유럽의 역사

여자 교황 '교황녀 요한나'의 전설과 "두 개를 가졌으며 잘 늘어져 있다" 검증 의식이라는 사기극

오늘날처럼 초 단위로 정보가 전달되고 사건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시대에도 하나의 사실에 대해 여러 버전이 난무한다면, 수백 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자료가 부족하거나 혼란스럽거나 신뢰도가 의심스러울 때는 진짜와 가짜, 즉 신화·전설과 실체를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유일하게 교황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여성인 '교황녀(Papissa) 요한나'의 전설과 그를 둘러싸고 만들어진 후속 사기극이 바로 그런 사례다.

말 위에서 출산한 교황?

이 전설에는 시대에 따라 여러 버전이 존재하지만, 모두 9세기에 요한나가 성 베드로의 자리에 올랐다는 점은 공통된다. 처음에는 그녀의 위장이 적발될 기미가 없었으나, 말을 타던 중 양수가 터지면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교황이 출산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경악에서 분노로, 그리고 분노에서… 돌에 맞아 죽는 형벌로 치달았다.

"Duos habet et bene pendentes" — 사기극의 탄생

일부 학자들은 이 전설(어디까지나 도시전설이다)에서 당시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에 대한 풍자, 즉 성 베드로의 자리에 여성 최고 사제가 앉을 수도 있었을 만큼 교회가 타락했다는 비판을 읽어낸다. 그리고 바로 이 전설에서 악명 높은 사기극이 탄생했다. 교회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모든 교황이 통과해야 하는 시험을 제정했다는 것이다:

Duos habet et bene pendentes

교황으로 임명될 때 후보자는 구멍 뚫린 의자에 앉아야 했고, 남성이라면 그 구멍으로 생식기를 내밀어야 했다. 한 명의 추기경이 육안으로 남성임을 입증해야 했으며(다른 버전에서는 촉각으로 확인했다고 전한다), 그러며 Duos habet et bene pendentes('두 개를 가지고 있으며 잘 늘어져 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그 구멍 뚫린 의자는 실존하지만 이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바로 sedia stercoraria(배변용 의자)로, 교황들이 앉아 사용하던 실용적인 의자였을 뿐이다. 미술 작품들 역시 이 사기극과 앞선 전설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가 이 시험을 받는 장면을 그린 작품에서는 젊은 수사가 옆구리 구멍을 통해 생식기의 존재를 만져 확인하는 모습이 등장하며, 교황녀 요한나의 출산 장면을 영원히 기록한 여러 그림들도 전승에 불을 지폈다.

실존한 어두운 시대, '포르노크라시아'

그러나 전설과 달리, 실제로 교회가 여성의 손아귀에 놓였던 어두운 시기가 존재했다. 904년 세르지오 3세의 즉위부터 964년 요한 12세의 죽음까지의 시기로, 16세기의 추기경이자 역사가인 체사레 바로니오(Cesare Baronio)가 저서 『교회 연대기』에서 Saeculum Obscurum(암흑 시대), 혹은 '포르노크라시아(Pornocracy)'라 명명한 바로 그 시절이다. 이 시기 교황들은 어머니와 딸, 두 명의 강력한 여인 테오도라(Theodora)와 마로치아(Marozia)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었다.

레오 5세 사후, 스폴레토 가문과 그의 사촌인 로마의 원로원 의원 겸 magister militum(군사령관) 테오피락토의 지지를 받아 세르지오 3세가 904년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보상으로 테오피락토는 vestararius(재정 담당관)에 임명되었고 훗날 집정관까지 올랐다. 그의 아내 테오도라는 로마의 senatrix(원로원 귀부인) 칭호를 받으며 새 교황을 지지했다… 다만 그녀의 침대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교황의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좌우했다. 15세가 된 마로치아 역시 어머니의 발자취를 따라 같은 교황의 침대를 거쳤고, 심지어 그 사이에서 아들 요한을 낳기까지 했다. 세르지오 3세 사후 테오도라는 세 명의 교황을 임명했다: 아나스타시오 3세(911~913), 란도(즉위 6개월 만에 사망), 그리고 914년의 요한 10세. 2년 뒤 테오도라가 세상을 떠나자 마로치아가 그 뒤를 이어받았다.

마로치아는 요한 외에 첫 남편인 스폴레토의 알베리코 1세 사이에서 또 다른 아들 알베리코 2세를 두고 있었다. 그녀와 요한 10세의 불화는 이내 표면으로 드러났고, 그녀는 두 번째 남편인 토스카나의 귀도(Guido)의 권력을 동원해 교황을 감옥에 처넣었으며, 요한 10세는 수감 중 의문사를 당했다. 어머니처럼 그녀 역시 차기 교황 세 명을 직접 골랐다: 레오 6세(928년, 7개월 재위), 스테파노 7세(928~931), 그리고 자신의 친아들인 요한 11세(931~935). 이를 통해 절대적 권력을 손에 넣은 그녀는 senatrix Patricia Romanorum(로마의 패트리키아 귀부인) 칭호까지 받았다.

두 번째 남편의 죽음 후 마로치아는 이탈리아 왕 우고(Ugo)와의 재혼으로 권력을 더욱 확장하려 했으나,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아들 알베리코 2세가 그 결혼에 맞서는 반대 세력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알베리코 2세와 요한 12세, 그리고 끝나지 않은 부패

알베리코 2세는 '로마인들의 공작 겸 원로원 의원'이라는 칭호를 내걸고 로마를 통치했다. 어머니가 왕 우고와 혼약을 맺던 바로 그날, 그는 어머니를 체포해 유폐시켰고 마로치아는 93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갇힌 채로 지냈다. 아들은 어머니의 역할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교황 임명권을 행사하다가, 955년 자신의 아들 — 즉 마로치아의 손자이자 테오도라의 증손자 — 요한 12세를 교황으로 앉혔고, 요한 12세는 964년까지 성 베드로의 자리를 지켰다.

이 혼란의 시절에 대해 크레모나의 주교 리우트프란트(Liutprand)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금장으로 꾸민 말을 타고 사냥을 즐긴 그들은, 사냥이 끝나면 무희들과 함께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고 이 파렴치한 창부들과 함께 실크 침구와 금색 수놓이 이불이 깔린 침대로 물러났다. 로마의 모든 주교는 유부남이었으며, 그들의 아내들은 성직자의 예복을 헐어 실크옷을 지어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