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당신이 믿던 종교재판의 진실: 민간 권력의 도구와 마녀사냥의 실상 (3/3)

5. 민간 권력의 복수 도구로 악용된 종교재판

종교재판이 때로 개인의 원한과 복수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 나아가 왕권의 시녀로 신앙과 무관한 일에 동원되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를 입증하는 두 가지 대표적이고도 상징적인 사례가 있다.

프레이 루이스 데 레온: 동료 학자들의 질투와 보복

시기와 거짓이 나를 이곳에 가두었네.
세상을 등진 현자의 겸허한 삶이여,
초라한 식탁과 거처, 아름다운 들판에서
오직 신과 함께 고독한 생을 보내니
시기하지도, 시기도 받지 않도다!

아우구스티노회 수사 프레이 루이스 데 레온은 자신의 종교재판 수난을 이 시로 요약했다. 그 원인은 도미니코회와의 알력, 즉 학문적 질투와 개인적 보복이었다. 당대 지성인이자 시인이었던 그는 1561년 살라망카 대학 교수직 임용 과정에서 도미니코회 후보를 제치고 선발되었고, 수년 뒤 또 다른 교수직에서도 도미니코회 인사를 누르고 임명되었다. 종교재판관들이 주로 도미니코회원에서 뽑혔다는 점을 악용해, 이들은 그의 저작을 샅샅이 뒤져 '무단으로 <아가서>를 히브리어 원전에서 스페인어로 번역했고, 불가타 역본과 다르다'는 빌미로 이단(프로테스탄트) 혐의를 씌웠다.

당신이 믿던 종교재판의 진실: 민간 권력의 도구와 마녀사냥의 실상 (3/3)

그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촌 수녀 아나 데 오소리오를 위해 원전 번역을 했을 뿐, 공표할 의도는 없었다고 항변했다. 5년에 걸친 지루한 심문 끝에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잃어버린 5년을 보상받을 길은 없었다. 전설에 따르면 복교 첫 강의에서 그는 분노 대신 평온하게 "Dicebamus hesterna die… (우리가 어제 말했듯이…)"라고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안토니오 페레스: 왕의 비서, 왕을 배신하다

두 번째 주인공은 펠리페 2세의 비서 안토니오 페레스다. 1578년 3월 31일 밤,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의 비서 후안 데 에스코베도가 마드리드 골목에서 암살당했다. 범인은 페레스로 지목되었으나, 펠리페 2세는 처음에는 그를 비호했다. 배경에는 복잡한 권력 다툼이 있었다.

당신이 믿던 종교재판의 진실: 민간 권력의 도구와 마녀사냥의 실상 (3/3)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 돈 후안은 레판토 해전 등 공을 세우고 영토와 '전하' 칭호를 원했다. 의심이 많은 펠리페 2세는 페레스에게 감시를 명했고, 페레스는 심복 에스코베도를 돈 후안의 비서로 심어놓았다. 그러나 에스코베도는 돈 후안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편을 바꿨다. 돈 후안이 플랑드르로 파견되자 에스코베도는 군자금과 전략을 논의하러 마드리드에 왔고, 페레스는 이를 '반란군과 내통'으로 조작해 왕의 재가를 받아 암살을 사주했다. 여기에 페레스의 방탕한 사생활과 에보리 공주와의 스캔들, 국정 기밀 유출 의혹이 얽혀 있었다.

마라뇬이 지적하듯 그들은 특권적 지위를 남용해 국정을 매매했으며, 포르투갈 왕위 계승 문제에서 에보리 공주의 가문 이익을 도모하려 했다. 에스코베도는 이 사실을 알고 폭로하려 했던 것이다. (마누엘 페르난데스 알바레스, <펠리페 2세와 그의 시대>)

진상이 드러나자 펠리페 2세는 배신감에 둘 다 투옥했다. 에보리 공주는 종신 유폐되었으나, 페레스는 보석으로 풀려나 6년간 재판을 끌다 재수감되었다. 1590년 아내의 도움으로 탈옥해 아라곤으로 피신, 아라곤 특권(푸에로)을 방패삼아 왕권을 거부했다. 펠리페 2세는 전국적 관할권을 가진 종교재판소를 동원, '신성모독' 혐의를 덧씌워 강제 송환하려 했다. 아라곤 시민들은 특권 침해라며 봉기했고, 사태는 내전 직전까지 치달았다. 페레스는 아라곤 대법관(후스티시아)을 부추겨 반란을 선동한 뒤 프랑스로 도주했고, 종교재판소는 궐석재판으로 그를 유죄 선고하고 화형상(초상화)을 태우며 재산을 몰수했다. 그는 평생 프랑스에서 펠리페 2세를 헐뜯으며 보냈다.

6. 스페인에는 마녀 타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두꺼비 눈, 개구리 다리, 온주 행운 가득하길!
박쥐 날개, 지렁이 꼬리, 오늘도 내일도 행복하길!
하마 어금니, 용의 뿔, 그 누구도 네 맘 다치지 않게!

당신이 믿던 종교재판의 진실: 민간 권력의 도구와 마녀사냥의 실상 (3/3)

이런 주문으로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여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13세기부터 '마녀는 있다'는 인식이 퍼졌지만, 본격적 마녀사냥의 포문은 1484년 인노첸시오 8세의 교서 수미스 데시데란테스 아페티부스(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 통칭 '마녀 교서'가 열면서부터다.

남녀 다수가 인큐버스(남성 악마)와 서큐버스(여성 악마)와 음란한 관계를 맺고, 주술로 여성의 다산, 가축 번식, 농작물 수확을 해치며, 세례 신앙을 모독하고 인류의 적인 악마의 부추김으로 끔찍한 죄악을 저질러 영혼을 위태롭게 한다는 소문이 우리 귀에 들어왔노라.

고발당한 이들은 대개 약초와 비방, 연애 비결을 아는 사회적 약자 여성들이었다. 종래엔 미신으로 치부되어 가벼운 징계로 그쳤으나, 이단적 요소(악마 숭배, 집단 난교, 흑미사)가 추가되며 사태는 달라졌다. 오스쿨룸 인파메(Osculum infame, 불명예의 입맞춤) 의식—악마의 항문에 입맞춤하며 복종을 맹세—같은 괴담이 정설처럼 퍼졌다.

당신이 믿던 종교재판의 진실: 민간 권력의 도구와 마녀사냥의 실상 (3/3) 마녀들의 안식일 (1798) – 고야

실무 지침서가 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 마녀의 망치)은 1486년 독일에서 출간된 도미니코회 수사 두 명의 저작으로, 여성혐오적 망상이 가득하다. '남성을 해치려는 여성들의 종파'로 마녀를 정의하고, 존부 입증·유형 분류·색출·기소·처형 절차를 상세히 다뤘다. 17세기 예수회 프리드리히 폰 슈페는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방식에 대해 "재판관과 성직자, 나 자신을 그 불행한 여자들처럼 고문해보라. 우리 모두 마녀로 자백할 것이다"라고 개탄했다.

당신이 믿던 종교재판의 진실: 민간 권력의 도구와 마녀사냥의 실상 (3/3)

이 광풍은 3세기간 유럽을 휩쓸었으나, 스페인 종교재판은 마녀사냥에 소극적이었다. 마녀술을 무식한 자들의 속임수·미신으로 보아 화형 대신 설교와 계도로 다스렸기 때문이다. 훌리오 카로 바로하가 <직업으로서의 종교재판관과 다른 생애들>에서 인용한 말처럼 "17세기 스페인인은 마술사·주술사로 명성 높지 않았다. 악마조차 스페인 주민을 믿지 않았다"는 조롱이 나올 정도였다.

내 친구 헤수스 카예호의 <마녀술 간사>에 나오는 통계는 충격적이다.

3세기간 처형된 마녀 약 5만 명(대다수 화형) 중 절반인 2만 5천 명이 독일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1만 명, 스위스 4천 명이었다. 반면 스페인은 59명, 이탈리아 36명, 포르투갈 4명에 불과했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수치다.

당신이 믿던 종교재판의 진실: 민간 권력의 도구와 마녀사냥의 실상 (3/3)

참고로 마녀 교서를 발표한 인노첸시오 8세는 인정된 사생아만 8명, 실제로는 16명 이상이었고, 콜럼버스 출항 8일 전 사망했다. 그의 묘비에는 Novi orbis suo aevo inventi gloria(신세계 발견의 영광이 그의 시대 것에 있다)라 새겨져 있다. 콜럼버스가 그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말년에는 젊은이의 수혈로 회춘하려다 세 청년을 제물로 바치고 수혈 감염으로 죽었다. 오래 살려던 미신이 죽음을 재촉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