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은 정부 수반의 무거운 책임 없이도 막강한 권력을 쥐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통치자가 아닌 '최측근 조언자'라는 자리에서 권력을 유지했으며,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결코 그 자리를 놓지 않았습니다.
귀족의 몸으로 시작된 성직자의 길
1751년 2월 2일, 페리고르 백작 아달베르(Adalbert)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귀족 가문—그 계보를 의심하는 전문가들도 있지만—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마르팡 증후군에 걸리면서 신체 여러 부위가 약해졌고, 이로 인해 군인의 길은 막히게 됩니다. 결국 그는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동시에 장자 상속권도 잃었습니다. 이 병은 다리 기형과 절름발이를 남겼고, 교활한 정치가로서의 성격까지 더해져 '디아블 부아퇴(Diable Boiteux)', 즉 '절름발이 악마'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귀족답게 세련된 교양과 매너를 갖추도록 교육받았으며, 이 높은 수준의 세련미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소명 없이 걷게 된 성직자의 길에서도 그는 귀족다운 생활 방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사치를 즐기고 방종하며 양심에 거침이 없었지만, 가문의 혈통이 성직 서열을 순조롭게 올려주는 데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780년에는 이미 프랑스 성직자단의 총대리이자 오텅(Autun)의 주교 자리에 올랐습니다.
혁명의 신부
루이 16세(Louis XVI)가 소집한 삼부회(Estates General)에서 그는 정치 무대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혁명의 원칙을 받아들인 성직자 대표 중 한 명으로서 입헌군주제와 온건 자유주의 진영에 합류한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벌어지던 격변 속에서도 이런 온건한 입장을 유지했음에도, 누구도 그를 국민의회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1791년 9월에는 국왕에게 제출된 헌법에 서명하기까지 했습니다. 혁명기 동안 그의 위상은 워낙 커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 1주년 기념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으며, 이를 통해 '혁명의 신부'라는 이미지를 굳혔습니다. 교회와 귀족에 속한 몸이었지만 그는 재산 몰수에 적극 참여하고, 장자 상속권을 폐지하는 상속 평등 분배법을 제안하는 데도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1790년, 의회 의장을 맡았던 해에 그는 성직자 기본법에 선서하며 교회와 완전히 결별하고 오로지 정치 경력에만 전념합니다. 이 결정 때문에 교황 비오 6세에게 파문당하기도 했습니다. 1792년에는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서의 행보가 급속히 상승합니다. 런던 주재 대사로 파견되어 영국의 중립을 확보해냈습니다. 그는 공포정치(Terror)를 피해 외교관 신분으로 1794년까지 영국에 머물렀고, 자신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미국으로 건너가 상업과 부동산 투기에 종사했습니다.
나폴레옹과의 만남, 그리고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의 몰락과 공포정치의 종식 이후, 탈레랑은 프랑스로 돌아와 긴장된 정국을 발판 삼아 마침내 정치적 전성기를 맞습니다. 처음으로 외무장관에 임명되어 유리한 고지에서 자신만의 정치 스타일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무렵 그는 야망 넘치는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를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 모두 이 시기를 발판으로 권력의 중심에 영원히 자리 잡고자 했고, 탈레랑은 젊은 보나파르트 안에서 그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코르시카 출신 군인의 무한한 야망을 역이용해, 장군의 미래 계획에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존재로 자리매김합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의 음모, 곧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 탈레랑이 가담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그는 나폴레옹이 감행한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도 외무장관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또한 새 집정관의 팽창주의적 야욕은 탈레랑에게 필수적인 역할을 안겨주었습니다. 그의 인맥과 능력, 그리고 혈통 모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방종한 정치가는 나폴레옹의 강요로 카트린 그랑(Catherine Grand)과 결혼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내가 있는 것이 필수적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황제와의 결별
그동안 나폴레옹을 지지해 왔지만, 탈레랑은 황제가 오스트리아와 영국을 향해 가하는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압박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1807년 사임합니다. 단, 작위는 내려놓지 않았으며 에르푸르트 회담(Erfurt Conference) 같은 일부 외교 업무에는 계속 협력했습니다. 이 회담에서 유럽 군주들은 대륙의 새로운 정치 질서에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소원함 뒤에서, 탈레랑은 이미 프랑스 제국의 경찰장관 푸셰(Fouché)와 함께 황제를 겨냥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를 알아챈 나폴레옹은 두 사람을 상대로 공개 심판을 열었고, 푸셰는 어떻게든 피했지만 귀족은 망설임 없이 심판에 응했습니다. 논변 능력과 법률 지식으로 무장한 탈레랑은 나폴레옹을 굴욕감에 빠뜨렸고, 화가 난 나폴레옹은 모욕을 퍼부었습니다. 탈레랑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그토록 무례하다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 한마디로 탈레랑은 황제를 대중 앞에서 완벽히 짓눌렀습니다. 그 결과, 연합군이 1814년 나폴레옹을 패퇴시켰을 때 탈레랑은 부르봉 왕가의 왕위 복귀를 도왔습니다. 임시 정부의 일원으로서 우선 총리로 활동하다가 루이 18세(Louis XVIII)의 귀환 이후에는 외무장관을 맡았습니다.

빈 회의와 말년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과 최종 추방 이후 빈 회의(Congress of Vienna)는 오래 지속될 유럽의 세력 균형을 설계했습니다. 프랑스 대표였던 탈레랑은 구(舊) 동맹국들 사이의 이견을 교묘히 이용해, 프랑스의 군사적 패배가 과도한 외교적 징벌로 이어지지 않도록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혁명에 헌신했던 그를 용서하지 않는 극단 왕당파들의 적개심은 그를 실질 정치에서 밀어냈습니다. 그는 귀족원 의원으로 남아 샤를 10세(Charles X)의 절대왕정에 맞선 자유주의 야권에 참여했고,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Louis Philippe d'Orléans)을 왕좌에 앉힌 1830년 혁명을 지지했습니다. 이후 새 입헌정부와 협력해 런던 주재 대사이자 벨기에 문제 해결 회의의 대표로 활동했습니다. 새로 생긴 벨기에 왕국을 희생삼아 프랑스 국경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183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합니다.
나폴레옹의 돈으로 산 발랑세(Valençay) 성에서의 '영광스러운 고독' 속에서 그는 회고록을 집필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무너진 적 없는 정부를 배신한 적은 결코 없다"며, "프랑스의 이익과 반대되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1837년 성을 떠난 그는 죽기 전에 교회와 화해했고, 1838년 5월 17일 세상을 떠나 성 근처 예배당에 안장되었습니다.
외교의 왕자, 영원한 논쟁거리
오늘날 탈레랑은 여전히 논쟁적인 인물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신자 중 하나로 보고, 다른 이들은 결코 자신의 신념을 깨지 않고 언제나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이상주의자로 평가합니다. 분명한 것은, 탈레랑이 동맹과 조약 체결, 그리고 연합의 해체와 창설에 참여하며 근대 외교의 첫 번째 선례를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업적으로 그는 '외교의 왕자(Prince of Diplomats)'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어쩌면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의 작가들이 이 정치가를 음모 플롯의 참고 대상으로 삼았던 것도 당연할지 모릅니다.
프란세스크 마리 콤파니(Francesc Marí Company)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