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필비(Kim Philby)는 소련을 위해 활동한 영국 스파이 중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오랫동안 영국 정보기관의 요직에 있으면서도, 손에 쥔 거의 모든 정보를 소련 측에 넘기며 완벽한 이중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바로 스페인 내전 당시 필비가 프랑코 총통 본인으로부터 군사공로십자훈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소련 스파이에게 적진의 최고 지도자가 훈장을 수여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유례없이 짙은 대목이다.
NKVD의 장기 침투 작전, '케임브리지 서클'
1930년대 초, KGB의 전신인 NKVD는 장기 전략을 통해 영국 정보기관 깊숙이 침투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해 소련 첩보부는 '친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젊은 엘리트 지식인 집단에 주목했고, 이들이 훗날 '케임브리지 서클(Cambridge Circle)'로 불리게 된다.
구성원은 해럴드 에이드리언 러셀 '킴' 필비, 도널드 매클린, 가이 버제스, 앤서니 블런트, 존 케언크로스 등이었다. 소련 첩보기관의 참모진은 이들에게 유명한 MI6의 전신인 SIS(비밀정보국)에 잠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빈 시절, 숨겨야 했던 붉은 이력
문제는 필비의 배경이었다. 1933년 그는 돌푸스(Dollfuss) 총리의 반동적 통치에 맞서던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과 합류하기 위해 빈으로 떠났다. 돌푸스 정권이 이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자 필비는 결국 빈을 떠나야 했다. 물론 그의 도피는 큰 의미가 없었으니, 몇 달 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돌푸스는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필비는 헝가리계 유대인 공산주의자였던 연인 리치(Litzi) 프리드만과 결혼하는데, 이 결혼 덕분에 리치는 영국 여권을 손에 넣고 오스트리아를 탈출할 수 있었다.
스페인 내전 취재와 프랑코의 훈장
앞서 말했듯 이런 '붉은' 이력 때문에 필비가 영국 정보기관에 진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NKVD는 그가 먼저 '비공산주의자'라는 평판을 쌓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고안한 방법은 과감했다. 필비를 스페인으로 보내, 국민파 진영 쪽에 선 프리랜스 기자로 내전을 취재하게 하여 프랑코 정권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임무 수행 중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1937년 12월, 필비는 다른 외신 기자들과 함께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 공화파의 폭탄이 자동차 바로 옆에서 터지는 상황을 겪었다. AP통신, 데일리 텔레그래프, 로이터통신 소속 기자들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필비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프랑코 선전부는 국제 언론의 주목과 호응을 얻기 위해 이 생존자에게 군사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이렇게 해서 소련 스파이 킴 필비의 가슴에 프랑코의 훈장이 달리게 된 것이다.
영광과 몰락, 그리고 모스크바행
내전에 관한 그의 통신 기사들과 프랑코가 직접 수여한 훈장은 필비가 영국 정보기관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이후 수년간 요직을 거치며 영국과 미국 동맹국의 핵심 비밀을 소련에 흘려보냈다.
그러나 동료 매클린과 버제스가 모스크바로 망명하면서 필비도 의심의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1951년 영국 정보기관에서 해고된다. 이후 그는 중동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1963년 소련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기 직전 모스크바로 도피하며 화려한 이중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함께 읽고 볼 만한 책과 드라마
필비와 '케임브리지 서클'의 역사를 더 깊이 알고 싶은 독자라면 로버트 리텔(Robert Littell)의 『영 필비(Young Philby)』를 권한다. 영국 정보기관의 '두더지'를 다룬 작품으로는 존 르 카레(John le Carré)의 명작 『틴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스마일리의 사람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에는 케임브리지 서클 멤버들의 이야기를 그린 BBC 드라마 『케임브리지 스파이스(Cambridge Spies)』도 시청해 보았다. 영국 드라마답게 세트와 고증이 훌륭하고 역사적으로도 신뢰할 만하다. 다소 기복이 있고 서사적 리듬감이 아쉬운 편이지만, 영국의 '두더지'들의 행보와 내면의 동기에 파고들고 싶은 이들에게 충분히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이미지 | 킴 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