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오현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반기를 든 남자,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이 의미하는 것

오현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반기를 든 남자,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이 의미하는 것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Gaius Avidius Cassius)는 '오현제'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당시 황제 다음가는 지위까지 올랐던 그는 대체 왜 반역을 감행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그 배경과 의미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시리아에서 태어난 최고의 엘리트

카시우스는 현재의 시리아 영토 안, 당시 시리아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약 100km 떨어진 키로스(Kyros)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아래에서 두각을 나타내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에는 이집트 총독에 오른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헬리오도루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태생부터 상당히 행운을 타고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 황제의 직할령으로, 원로원 의원조차 황제의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는 특별한 땅이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때 게르마니쿠스가 허가 없이 이집트를 방문했다가 황제의 진노를 산 일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런 곳의 총독직을 맡았다는 것은 곧 황제로부터 막중한 신임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카시우스는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승이기도 했던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당대 일류 웅변가였던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황제보다 열 살 어린 그는 어린 시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청년 시절에는 로마에서 수학한 정통 엘리트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를 깊이 신임하여, 즉위 초기에 파르티아와의 전쟁이 일어나자 카시우스를 동방에 파견했습니다.

파르티아는 새 로마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로마의 기세를 시험해 보는 전통이 있었고, 역대 황제들은 아르메니아에 친로마 성향의 왕을 세워 이를 막아 왔습니다.

오현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반기를 든 남자,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이 의미하는 것

그러나 아우렐리우스가 얕보였는지, 이번에는 파르티아가 상당히 공격적으로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습니다.

카시우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로마의 숙적 파르티아 제국을 크게 격파했고, 로마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인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본국 로마의 집정관에도 임명되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화려한 승진 코스였습니다.

172년에는 이집트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시리아 총독에게는 이집트에 진입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폭동 진압을 위해 카시우스에게 동방 전역의 군사권을 위임했습니다. 카시우스는 이를 눈 깜짝할 새에 해결하며 그 뛰어난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황제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반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는 '오현제'로 불리며 후세에 성군(聖君)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평가의 상당 부분은 저서 『명상록』의 훌륭함에서 비롯된 것이지, 정치적 능력 자체가 높이 평가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175년, 카시우스는 스스로를 황제라고 선언했습니다. 로마에 대한 반란이었습니다.

카시우스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는 고대부터 끊임없이 논쟁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사망했다는 잘못된 소식이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후계자로 지명되지 않은 채 황제를 자칭한 것은 명백한 난행입니다.

유언비어의 진위 여부야 어떻든, 로마에 대한 반란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 자체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흔히 아우렐리우스의 주변 인물들이 지쳐 있었다는 말이 회자됩니다.

역사가 보여주듯 아우렐리우스는 친아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임명했습니다. 콤모두스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인물 중 한 명이었습니다.

오현제 중 누구도 직계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세대가 입양을 통해, 즉 뛰어난 인재를 양자로 삼아 제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카시우스는 서신에서 당시 로마의 부패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적었습니다.

"아십니까? 우리 위대한 철학자(아마도 아우렐리우스를 지칭)가 깊이 신임하는 근위대 관료 중 한 명이, 임명된 지 사흘 만에 재산을 불렸다는 사실을요. 그는 대체 어떻게 그렇게 했습니까? 속주 백성들을 수탈하지 않고 그럴 방법이 있다면 저도 알고 싶습니다."

결국 카시우스는 측근 중 한 사람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백인대장(센투리오)이라는 것 외에 범인의 이름은 기록에 남지 않았습니다.

카시우스 반란의 진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정점에 대한 분노를 품었을 수도 있고, 과도한 권력에 취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정의감에 불타 제국의 미래를 진지하게 걱정하다 개혁을 시도했을지도 모릅니다.

에드워드 기번이 묘사한 것처럼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시대가 평화롭고 이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토니누스 역병이 만연했고, 흉작으로 식량이 부족했으며, 민심은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카시우스 자신이 훌륭한 인물이었던 만큼, 그런 인재마저 이반하게 만든 시점에서 아우렐리우스를 성군이라 부르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는 없었던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