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초반,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스도교 왕국들은 국경을 확정하고 정체성을 정립하려 분투하는 동시에, 비시고트 왕조의 후예인 이웃 왕국들과 무슬림이 점령한 옛 히스파니아 영토를 놓고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알폰소 1세의 죽음과 계승 위기
1134년, '전사왕' 알폰소 1세가 프라가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사망하면서 아라곤 왕국은 심각한 계승 위기에 직면했다. 1104년 형 페드로 1세에 이어 즉위한 알폰소 1세는 1076년부터 아라곤과 나바라의 왕위를 겸임해왔다. 그는 카스티야와 무슬림 양쪽으로부터 영토를 빼앗아 1118년 사라고사를 정복하는 등 눈부신 업적을 남겼으나, 카스티야의 우라카 왕비와의 결혼이 교황령으로 해소되면서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알폰소 1세는 유언으로 해외 군사 수도회를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아라곤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첫 후보는 40년 넘게 수도사로 지낸 왕의 동생 라미로 2세 '수도사왕'이었다. 그러나 나바라인들은 가르시아 라미레스를 내세웠고, 아라곤 귀족들 사이에서도 라미로 2세 지지파와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에게 왕관을 바치려는 파벌로 갈라졌다.
우에스카의 종 전설과 라미로 2세의 통치
전설적인 '우에스카의 종' 이야기는 라미로 2세가 반항적인 귀족들을 불러모아 한 명씩 목을 베고 그 머리통으로 종을 만들어 울렸다는 잔혹한 일화를 전한다. 전설을 떠나 라미로 2세의 3년 통치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알폰소 7세가 사라고사에 입성하고, 가르시아 라미레스는 발돌루엔고 조약을 핑계로 라미로 2세를 산 후안 데 라 페냐 수도원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아라곤 귀족들은 정세에 따라 수시로 충성을 바꾸었다.
웅카스티요의 여영주, 타레사 데 베아른
이 혼돈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 타레사 데 베아른이다. 여성으로서 요새의 영주, 그것도 왕국의 전략적 요충지인 운카스티요 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타레사는 십자군 원정 베테랑이자 알폰소 1세의 절친한 전우인 가스톤 데 베아른의 아내였다. 1118년 사라고사 정복 후 알폰소 1세는 가스톤을 '사라고사 영주'로 봉하고 산타 마리아 라 마요르 지구와 운카스티요 성을 하사했다. 1124년 알폰소 1세가 안달루시아 원정에 나설 때 가스톤은 신화적인 올리판트(상아 나팔)를 앞세워 동행했으며, 1130년 전사할 때까지 왕을 따랐다.
남편의 죽음과 타레사의 선택
남편 사후 타레사는 운카스티요 성을 상속받아 라미로 2세 즉위 후에도 영유권을 지켰다. 그러나 라미로 2세가 아키텐 가문 출신 이네스 드 푸아티에와 결혼하자, 베아른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타레사는 나바라의 가르시아 라미레스를 지지하기로 결정한다. 게다가 라미로 2세가 산 후안 데 라 페냐 회동에서 남편이 가졌던 사라고사 영주권을 인정하지 않자 반감은 더욱 커졌다.
운카스티요 전투와 시민의 승리
타레사는 운카스티요 성으로 돌아와 가르시아 라미레스에게 성을 넘기려 했으나, 마을 주민들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저항했다. 1136년 성을 넘기려는 수비대와 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고, 시민들이 승리했다. 라미로 2세는 주민들의 공로를 치하해 '기지와 프랑크 특권'을 부여했다.
말년과 운카스티요의 이후
타레사는 이후에도 운카스티요 여영주 지위를 유지했고, 1144년 유언으로 사후 성을 템플 기사단에 넘기길 원했으나, 1154년 사망 시에는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왕자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운카스티요 성과 마을은 1363년 아라곤, 나바라, 카스티야 삼국의 다툼에서 다시 주역으로 등장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