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튜더 왕조의 기원: 마가렛 보퍼트와 수많은 예상치 못한 운명 (3부)

튜더 왕조의 기원을 마가렛 보퍼트 중심으로 다룬 연재물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글이다. 에드워드 4세의 죽음과 리처드 3세의 즉위 이후 상황부터 이야기를 이어간다.

6. 리처드 3세의 짧고 혼란스러운 치세와 헨리 튜더의 왕위 후보 부상

리처드 3세가 왕관을 쓴 고작 2년은 오늘날까지도 영국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이고 논쟁적인 시기로 꼽힌다. 본래 에드워드 4세 사후 왕위는 장남 에드워드 5세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새 왕은 미성년자였고, 선왕은 동생 리처드에게 '왕의 보호자' 역할을 맡겨 어린 조카를 보필하게 했다.

튜더 왕조의 기원: 마가렛 보퍼트와 수많은 예상치 못한 운명 (3부)

리처드는 왕모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자신의 친정 식구들과 결탁해 정권을 장악하려 한다고 의심하고 신속히 움직였다. 그는 런던으로 향하던 에드워드 5세의 행렬을 스토니 스트랫퍼드에서 가로채고, 우드빌의 오빠인 리버스 경을 체포·처형했다. 우드빌의 첫 결혼 소생인 리처드 그레이와 에드워드 4세의 충신 윌리엄 헤이스팅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사태를 파악한 왕모는 웨스트민스터 성소로 피신했다. 리처드는 런던에 입성해 조카를 런던탑(당시는 감옥보다 왕궁에 가까웠다)에 머무르게 하며 대관식을 준비했다. 이어 에드워드 5세의 동생 리처드 요크 공도 런던탑으로 불러들였다.

대관식 직전, 한 사제가 나서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할 당시 이미 엘리노어 버틀러와 비밀리에 혼인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드빌과의 결혼은 무효며, 그 소생은 사생아라는 논리였다. 리처드는 이를 의회에 상정했고, 의회는 티툴루스 레기우스(Titulus Regius) 결의를 통해 에드워드 4세와 우드빌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그 자녀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다. 왕위는 선왕의 동생, 즉 리처드 3세에게 돌아갔다.

튜더 왕조의 기원: 마가렛 보퍼트와 수많은 예상치 못한 운명 (3부)

사생아로 선포된 뒤 '탑의 왕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영국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다. 토머스 모어와 셰익스피어의 작품 이래 오랫동안 리처드 3세가 이들을 살해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 오명 쓴 군주를 옹호하며 버킹엄 공작이나 마가렛 보퍼트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거나, 왕자들이 탑에서 죽지 않고 나중에 램버트 심넬과 퍼킨 워벡 같은 왕위 요구자로 나타났다는 설까지 제기된다. 이 문제는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며, 그 운명과 책임 소재를 확정 짓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왕자들의 행방을 둘러싼 소문, 리처드의 왕위 찬탈 과정, 리버스 경과 헤이스팅스 같은 인기 있는 인물들의 처형은 새 군주에게 귀족들의 적개심을 안겼다.

초기에 체포됐던 토머스 스탠리는 리처드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풀려났다. 아들이 불만 세력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명백한 위협임에도, 마가렛 보퍼트는 리처드 3세와 앤 네빌의 대관식에서 최고 예우를 받는 등 겉으로는 우대받았다.

하지만 마가렛은 이미 아들을 왕좌에 앉히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전 남편의 조카인 헨리 스태퍼드, 버킹엄 공작이 가세했다. 그는 헨리 튜더 못지않게, 어쩌면 더 강력한 왕위 계승 명분을 가졌고, 표면적으로는 리처드 3세의 최측근이었다.

역사가들은 그가 튜더 진영에 합류한 동기를 헤리퍼드 백작 작위 거절, 자기 딸과 왕세자의 혼인 제안 거부, 에드워드 4세 사후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질투, 그리고 자신의 감시하에 있던 리처드의 정적 존 모턴 일리 주교의 설득 등에서 찾는다. 이유가 무엇이든 버킹엄은 리처드 3세 축출과 헨리 튜더 옹립의 핵심 인물이었다.

내부 지지의 필요성을 잘 아는 마가렛은 왕모 엘리자베스 우드빌에게 접근했다. 두 여성은 차이를 접고 이해관계를 맞췄다. 우드빌은 에드워드 4세 충신들이 리처드 3세를 버리고 마가렛의 아들을 지지하도록 이끌 수 있었다.

댄 존스는 이 상황이 얼마나 예외적이었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헨리 튜더가 왕위 후보로 거론된 것 자체가 영국 왕실이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아버지 에드먼드는 헨리 6세의 이복동생이고, 어머니 마가렛 보퍼트에게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피가 약간 흐를 뿐이다. 평시라면 왕위를 주장하기에 턱없이 약한 혈통이다. 1483년 당시 헨리는 남웨일스와 브르타뉴의 성에서 평생을 보낸, 영국인 대부분에게 낯선 소규모 랭커스터 가문의 상속자였다. 하지만 리처드 3세의 왕위 찬탈이 정치적 금기를 깨부수면서,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할 가능성이 열렸다.

튜더 왕조의 기원: 마가렛 보퍼트와 수많은 예상치 못한 운명 (3부)

헨리 튜더가 왕이 되면 에드워드 4세와 우드빌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로 약조했다. 이 혼인은 요크 가와 랭커스터 가를 하나로 묶어 장미전쟁의 종언을 상징했다. 또한 헨리가 평생의 절반을 대륙에서 망명하며 보낸 무명 인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에드워드 4세의 상속녀와의 결합은 그에게 정통성의 외피를 입혀주고 망설이는 유력자들을 끌어들이는 결정적 카드였다(탑의 왕자들이 이미 죽었다는 가정하에).

음모자들은 브르타뉴 공작에게 리처드가 제시한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주어 헨리의 석방을 이끌어냈고, 튜더는 왕위 도전을 위한 행동의 자유를 얻었다.

1483년 10월 시도된 잉글랜드 침공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헨리를 태운 함대는 악천후로 흩어졌고, 내부의 핵심 세력인 버킹엄 공작은 날씨와 이반으로 병력이 설탕 녹듯 줄어든 끝에 체포돼 처형됐다.

더 철저히 준비된, 더 좋은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7. 보스워스 전투: '스탠리 가문 변수'와 헨리 튜더의 즉위

1483년 10월의 참패는 튜더 진영의 왕위 야망을 꺾지 못했다. 리처드는 반란 가담자들을 반역자로 선포하는 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에는 마가렛 보퍼트도 포함됐지만, 버킹엄의 움직임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스탠리는 제외됐다.

강력한 동맹(그리고 적잖은 병력)을 잃고 싶지 않았던 리처드는 마가렛에게 사형과 몰수 대신 남편의 감시 아래 종신 가택연금을 내리고, 그녀의 모든 재산을 스탠리에게 넘겼다.

한편 리처드는 브르타뉴 공작을 압박해 헨리 튜더를 넘겨받으려 했다. 마가렛은 남편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브르타뉴 인들에게 체포되기 직전 아들을 프랑스로 도피시켰다.

리처드는 처제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설득해 웨스트민스터 성소의 위태로운 생활에서 벗어나 궁정으로 나오게 했다. 우드빌은 망명 중인 첫 결혼 소생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헨리 튜더 곁을 떠나 리처드 품으로 돌아오라 권유하기까지 했다.

이런 회유 노력에도 리처드의 입지는 불안했다. 왕위에 오른 과정, 연이은 처형, 탑의 왕자들 실종 소문, 아내 앤 네빌이 1485년 3월 사망하자 조카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재혼하려 한다는 소문(심지어 왕이 아내를 독살했다는 말까지 돌았다) 등은 리처드를 폭군으로 각인시켰고, 튜더 진영은 이를 선전 도구로 삼아 새 침공의 명분을 쌓았다.

그들에게는 명분이 절실했다. 프랑스 망명 중이던 헨리 튜더는 정치가 필리프 드 코민에게 '수중에 돈 한 푼 없고, 긴 망명 생활로 지쳤으며, 왕권을 되찾으려는 군주라기보다 비운의 운명에 체념한 사람의 연설을 한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이런 조건에서 1485년 8월 7일, 헨리는 프랑스 용병들을 이끌고 웨일스를 통해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양측 전력은 팽팽히 맞섰다. 그리고 13년 전 마가렛 보퍼트가 토머스 스탠리를 남편으로 택한 지혜(또는 행운)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 왔다.

조카딸과의 재혼 소문을 잠재우려 리처드는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토머스 스탠리의 런던 저택으로 보냈다. 이는 실수였다. 마가렛은 그곳에 없었지만, 3,000~5,000명의 병력을 거느린 막강한 스탠리 가문이 튜더 진영에 가담하는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리처드가 뒤늦게 엘리자베스를 요크셔의 성으로 옮겼을 때는 이미 늦었다.

헨리 튜더가 밀퍼드 헤이븐에 상륙했다는 소식에 리처드는 토머스 스탠리의 장남을 인질로 내놓으라 요구하며 부친의 지지를 묶어두려 했다. 한편 헨리는 웨일스에서 재스퍼 튜더의 존재 덕분에 현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용병대에 병력을 보탰다.

리처드는 노팅엄에 전국의 유력자들을 소집했다. 토머스 스탠리는 병을 핑계로 불참했지만, 튜더 편에 공개적으로 서지도 않았다. 아들의 목숨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스탠리의 동생 윌리엄은 가문의 병력을 이끌고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채 곧장 결전지로 향했다.

마침내 1485년 8월 22일, 리처드 3세와 헨리 튜더의 군대가 보스워스에서 맞붙었다. 전투 초반 윌리엄 스탠리의 병력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관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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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워스 결전의 주역들: 리처드 3세와 헨리 7세

그들이 마침내 움직였을 때, 향한 곳은 토머스 스탠리의 의붓아들 헨리 튜더의 진영이었다. 전세가 기울자 리처드 측근들은 도망칠 말을 권했지만, 왕은 '오늘 나는 왕으로서 살거나 죽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날, 마지막 플랜태저트 왕 리처드 3세는 보스워스 전장에서 왕관과 목숨을 함께 잃었다. 1154년부터 잉글랜드를 다스려 온, 헨리 2세·사자심왕 리처드·존 왕·에드워드 1세 같은 걸출한 군주들을 배출한 왕조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왕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485년 10월 30일, 헨리 7세가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14년 만에 재회한 모자 앞에서 마가렛 보퍼트는, 아들을 잉글랜드 왕으로 만들겠다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꿈이 이루어졌음에 눈물을 흘렸다.

맺음말

튜더 왕조의 등극사를 돌이켜보면, 헨리 7세의 즉위를 막을 수도 있었던 '만약'의 순간들을 헤아릴 수조차 없다. 카트린 드 발루아가 오웨인 튜더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헨리 6세가 외조부의 정신병을 물려받지 않았다면, 마가렛 보퍼트가 윌리엄 드 라 폴의 아들과 결혼했다면, 열세 살 소녀의 출산이 잘못됐다면, 장미전쟁이 랭커스터와 요크 가문을 그토록 철저히 참수하지 않았다면, 리처드 3세가 보낸 체포조가 브르타뉴에서 헨리 튜더를 잡기 몇 시간 전에 도착했다면, 1483년 실패한 침공 후 리처드가 마가렛 보퍼트를 살려두지 않았다면, 스탠리 가문이 리처드 3세에게 충성을 지켰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결과 유명한 튜더 왕조의 시대가 열렸다.


참고 문헌

  • 다니엘 페르난데스 데 리스, 셰익스피어가 말하지 않은 장미전쟁, 마드리드, Libros.com, 2020
  • 다니엘 페르난데스 데 리스, 플랜태저릿, 마드리드, Libros.com, 2018
  • 댄 존스, The Hollow Crown. The Wars of the Roses and the rise of the Tudors, 런던, Faber & Faber Limited, 2015
  • Plantagenets, The Kings Who Made England, 런던, William Collins, 2012
  • 피터 애크로이드, A History of England. Volume I (Foundations), 런던, Macmillan, 2011
  • 로이 스트롱, The Story of Britain, 런던, Pimlico, 1998
  • 사이먼 샤마, A History of Britain, 런던, BBC Worldwide, 2000
  • 데릭 윌슨, The Plantagenets, The Kings That Made Britain, 런던, Quercus, 2014
  • 네이선 아민, The House of Beaufort. The Bastard Line that Captured the Crown, 스트라우드, Amberley Publishing, 2017
  • 엘리자베스 노턴, Margaret Beaufort, Mother of the Tudor Dynasty, 스트라우드, Amberley Publishing, 2011
  • 토머스 펜, Winter King, The Dawn of Tudor England, 런던, Penguin Books, 2012
  • 알리시아 카터, The women of the Wars of the Roses,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