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아테네 대역병: 고대 그리스 최악의 전염병, 그 비밀과 비극

기원전 430년에서 427년 사이,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아테네를 강타한 전염병은 '아테네의 역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역병은 도시 인구의 상당수가 목숨을 잃는 참극을 낳았으며, 당시 기록에는 병에 걸린 사람들의 극심한 고통과 혼란에 빠진 시민들의 절망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아테네의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 역시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오늘날까지 아테네를 덮친 병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천연두라는 설을 비롯해 홍역,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등 다양한 가설이 존재하지만, 남아 있는 기록이 제한적이고 과학적 연구 결과도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전염병이 아테네 인구의 약 1/3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질병의 발생 배경

아테네 역병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상세히 기술한 것으로 유명한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남겼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역병이 시작될 당시 아테네에 거주하며 질병이 가져온 파괴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고, 그 역시 병에 걸렸지만 다행히 살아남았습니다.

아테네 대역병: 고대 그리스 최악의 전염병, 그 비밀과 비극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430년부터 아테네를 덮친 병은 이집트 남부 지역(그가 '에티오피아'라고 부른 곳)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북아프리카와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 지역을 거쳐 마침내 그리스까지 번졌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아티카(아테네가 위치한 지역)에서 질병이 나타난 시점을 스파르타 군대의 진입과 연결 지어 설명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테네 역병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직후에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이어졌으며, 급격히 성장하는 아테네에 대한 스파르타의 경계심이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아테네에서 역병은 처음 항구 지역(피레우스)에서 기록되었고, 이후 도시 상부로 퍼져나갔습니다. 병이 도시에 자리 잡은 뒤에는 특히 인구 밀집 지역에서 더 강력하게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여기에 전쟁 상황에서 페리클레스가 농촌 주민들에게 아테네 성벽 안으로 이주할 것을 명령하면서 상황은 눈덩이처럼 악화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밀집한 것은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 퍼지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집이 부족해 농촌 출신 주민들은 천막에 머물러야 했고, 이들은 급속도로 희생되면서 아테네 거리에 수많은 시신이 방치되는 참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역병의 증상

투키디데스는 질병의 증상도 상세히 기록하여, 아테네에서 벌어진 역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그는 이 병이 건강한 사람에게도, 이미 다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도 동등하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고 언급했으며, 환자들은 대개 7일에서 9일 사이에 사망했다고 전합니다. 투키디데스의 기록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머리에 격렬한 열감을 느꼈고, 눈은 붉어지며 염증이 생겼다. 입안(목구멍과 혀)은 곧바로 피색으로 변하고 비정상적이며 악취 나는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다음 단계에서 재채기와 쉰 목소리가 나타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가슴으로 내려가 심한 기침이 이어졌다. 병이 위장에 자리 잡으면 위가 불안정해지며 의사들이 말하는 갖가지 담즙을 토해냈고, 끔찍한 권태감이 뒤따랐다. 많은 경우 구토 후 경련이 이어졌는데, 이는 때로 빠르게 멈추기도 하고 때로는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투키디데스는 또한 피부의 붉어짐과 환자 몸에 생기는 작은 궤양을 언급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환자들은 극심한 열감을 호소했고, 일부는 이를 견디기 위해 차가운 물에 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았으며, 장에 문제가 생긴 환자들은 격렬한 설사를 동반해 빠르게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상당수가 생식기, 손가락, 관절 등에 후유증을 남겼거나 기억상실증을 겪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의학적 관찰은, 시신의 살점을 먹던 새들마저 죽었다는 사실과, 한번 병에서 회복된 사람은 재감염되지 않았거나 재감염되더라도 가벼운 증상만 보였다는 점입니다.

역병 속 아테네의 모습

아테네를 덮친 역병은 도시 주민들에게 막대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병이 그리스 도시에서 처음 나타난 질병, 즉 '처녀지(virgin soil)'에서 유행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병의 원인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는데, 일부는 신들의 벌이라 믿었고, 다른 일부는 스파르타가 물을 오염시켰다고 의심했습니다.

의사들이 가장 먼저 희생된 집단이었습니다. 환자들과 직접 접촉하며 치료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의사들조차 이 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이는 병이 아테네에서 처음 나타난 질병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합니다. 결국 의학적 치료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의학이 무력해지자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해 신전에서 신들의 자비를 구걸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습니다.

환자 수가 워낙 많고 사람들이 감염을 두려워한 나머지, 많은 환자들은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된 상태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죽음이 너무 많아 시신은 집안과 거리, 신전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막대한 사망자는 장례 의식의 부분적인 폐지로도 이어졌습니다. 가족들이 더 이상 화장용 장작더미를 만들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남의 가족이 만든 장작더미에 시신을 올렸고, 어떤 이들은 아무렇게나 매장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투키디데스는 또한 아테네 시민들의 향락적 행태를 기록했습니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고 느낀 많은 사람들이 쾌락 추구에 몰두했고, 행동의 결과 따위는 개의치 않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병이었을까?

아테네 대역병: 고대 그리스 최악의 전염병, 그 비밀과 비극

아테네를 강타한 질병의 정체는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역사학자와 과학자들 사이의 논쟁거리입니다.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이 도시를 그토록 잔혹하게 덮친 병이 무엇인지 특정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가설은 다음 네 가지입니다.

  • 천연두
  • 홍역
  • 발진티푸스
  • 장티푸스(장열)

그중 가장 최근에 제기된 것이 장티푸스 가설로, 2006년 그리스 과학자 마놀리스 파파그리고라키스가 제시했습니다. 그는 아테네 고대 묘지 케라메이코스(Kerameikos)에서 집단 무덤을 발굴했고, 유골의 치아에서 채취한 DNA 샘플에서 장티푸스를 일으키는 세균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연구는 다른 과학자들로부터 근거가 빈약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는 이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명쾌한 답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줍니다.

역병의 결과와 영향

3년간(기원전 430~427년) 지속된 아테네 역병의 가장 큰 결과는 당연히 막대한 사망자였습니다. 전문가들이 모은 통계에 따르면 아테네 인구의 약 1/3이 역병으로 사망했습니다(수치는 다소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 인구는 25만~3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아테네 대역병: 고대 그리스 최악의 전염병, 그 비밀과 비극

따라서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면 약 7만~1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지만, 역사학자들은 아테네 역병의 경우 수치를 다루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역병의 희생자 중에는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기원전 429년 사망)도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서 델로스 동맹의 성장과 강화를 이끌었으며, 여신 아테나에게 바쳐진 종교 건축물 파르테논 신전 건립의 주역이기도 했습니다.

참고 자료

|1|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117-118.

|2| 상동, p.115-116.

|3| The Plague at Athens, 430-427 B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