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로마에 다시 빛을 불러온 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로마에 다시 빛을 불러온 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세계사 교과서에는 네로나 테오도시우스의 이름이 빠지지 않지만, 정작 베스파시아누스라는 이름이 실린 세계사 교과서는 거의 없습니다.

아마도 그의 통치 시기가 화려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이 곧 '성과가 없었다'는 뜻일까요?

이번 글에서는 로마 제국 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기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네로의 공연에서 잠들어 버리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관료 인생은 순탄한 궤도를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엘리트가 밟아야 하는 명예로운 경력 코스인 '쿠르수스 호노룸'을 따라 젊은 시절 재무관(쿠아에스토르)과 법무관(프라이토르)으로 선출되었고, 게르마니아와 브리타니아에 부임한 뒤 서기 52년에는 집정관에 임명됩니다.

이후 프로콘술 자격으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맡았고, 로마로 돌아온 뒤에는 네로 황제의 마음에 들었는지 함께 그리스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네로의 가창 공연 중에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냉대를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유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총사령관으로 파견될 만큼 그의 능력은 이미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 그리고 아들 티투스와 함께 유대 전역을 지휘했습니다.

네로의 죽음, 혼란의 시대가 시작되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 원정에 몰두하고 있던 중, 네로 황제는 자결합니다.

네로 사후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차례로 황위를 다투는 이른바 '네 황제의 해(69년)'라 불리는 혼란의 시대가 열리는데,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 바로 베스파시아누스였습니다.

원래 황제로 추천된 인물은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였지만, 그는 스스로 황제의 그릇이 아니라고 판단해 베스파시아누스를 추대합니다. 이에 로마 동방의 핵심인 시리아 군단, 유대 전쟁 당시 로마 편에 섰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이끄는 유대, 황제 직할령인 이집트 속주가 앞장서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했고, 비텔리우스에게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분노하던 도나우 군단도 여기에 합류합니다.

유대 전역의 마무리를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지 않고, 대신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부하 프리무스를 로마로 보냈습니다. 프리무스는 비텔리우스를 화려하게 격파하는 활약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 베스파시아누스의 형 사비누스는 로마에서 비텔리우스파에게 살해당하고, 남은 차남 도미티아누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집니다. 비텔리우스파가 로마에 불을 질러 유피테르 신전이 불타버리면서, 로마는 다시 한번 전장으로 변하고 맙니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이후 100년 만에 로마가 전장이 된 상황에서, 이를 막을 사람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군단들이 싸우는 동안에도 로마 시민들은 일상생활에 무심하게 몰두했다고 합니다. 누가 황제가 되든 이제 시민들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경거리로 즐기기까지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전투에서 비텔리우스는 돼지처럼 끌려가 살해당했고, 죄인처럼 티베르 강에 던져졌습니다. 이후 무키아누스가 로마에 도착하면서 내전은 막을 내립니다.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 본인이 로마에 입성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유대 원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키아누스가 로마를 안정시키는 동안 유대 전역은 아들 티투스에게 맡겨졌고, 서기 70년에야 베스파시아누스는 드디어 로마에 입성합니다.

로마에 입성하자마자 그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의 노선을 계승하겠다는 이른바 '황제법'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칼리굴라와 네로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조차 이 무렵에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황제법을 새긴 비문은 현재 카피톨리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베스파시아누스는 전통적인 프린켑스(원수정) 노선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미 60세였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두 아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내리고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정식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부황제는 카이사르라는 전통이 바로 이때 탄생했다고 전해집니다.

네로 황제 이후 계속된 혼란으로 지친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감하게 증세를 단행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직접 인구 조사를 실시해 로마 시민의 수와 재산을 파악했고, 군단을 개편하고 기반 시설을 정비했습니다.

로마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콜로세움', 공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으로, 이를 건설한 베스파시아누스의 가문 이름(플라비우스)에서 유래했습니다.

로마에 다시 빛을 불러온 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는 8년에 불과한 장기 정권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사건 없이 평온하게 흘러갔습니다. 말년에는 "아이고, 슬프도다. 내가 신이 되는 것 같구나"라는 유언을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집니다.

서기 9년에 태어난 베스파시아누스는 79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69세라는 나이는 로마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히게 장수한 경우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개인적 평가

베스파시아누스의 평판이 늘 높은 것은 아닙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처럼 결연한 의지로 대개혁을 단행하지도 않았고, 콘스탄티누스처럼 연전연승을 거두지도 못했습니다. 카이사르처럼 후세의 토대를 놓지도, 아우구스투스처럼 오래 지속될 체제를 만들지도 못했습니다.

증세는 언제나 미움받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는 세금을 올려 사치를 누리지 않았습니다. 콜로세움 건설 역시 공공 사업으로 진행되었으며, 그의 긴축 재정이 훗날 '오현제 시대'를 떠받치는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분명히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진짜 수비형 선수가 화려한 플레이가 적듯, 진짜 정치가 역시 화려한 묘기가 적을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네로 황제 사후 세 황제의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고 로마에 다시 빛을 되찾아 준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를 재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북방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를 파견했으며, 게르만족이 세운 이른바 '갈리아 제국'을 해체하는 데도 성공합니다.

물론 그의 업적이 역대 영웅들에 비해 확실히 떨어지고, 개인적 재능 또한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세계사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업적을 조금 더 높이 평가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없었다면 에드워드 기번이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불렀던 오현제 시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로마 제국 자체가 이때 멸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평화로운 시대로 건너가는 다리를 놓은 그의 업적은, 충분히 '명군'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