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먹는 것을 좋아했던 로마 제8대 황제 비테리우스

먹는 것을 좋아했던 로마 제8대 황제 비테리우스

라틴어 표기로는 '비텔리우스(Vitellius)'가 정확하지만, 이 블로그에서는 미네르바나 네르바처럼 최대한 부드럽게 읽히는 표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비테리우스'로 표기했습니다.

황제 네로가 죽은 뒤, 1년 동안 세 명의 황제가 차례로 몰락하는 이른바 '3황제 시대'가 찾아옵니다. 비테리우스는 바로 그 세 명 중 마지막 황제입니다.

로마 최강의 게르마니아 군단 사령관

로마의 잠재적 적은 제국 초창기부터 멸망 때까지 늘 페르시아와 게르만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파르티아나 사산조 같은 문명 국가였기에 협상이 가능했지만, 게르만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어 교섭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제국 최강의 군대를 게르마니아 방어선에 배치해야 했습니다.

비테리우스가 이끈 것이 바로 그 최강의 군단입니다. 그의 공식 이름은 아울루스 비테리우스 게르마니쿠스(Aulus Vitellius Germanicus)입니다.

로마에서는 이름이 곧 본명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훗날 '황제'를 상징하게 된 카이사르(Caesar)는 원래 포에니 전쟁 당시 코끼리처럼 용맹하게 싸웠다고 해서 붙여진 가문 이름입니다.

비테리우스의 별칭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를 다스린 자'라는 뜻이지만, 제국 초기의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비테리우스는 거의 무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갈바 황제 시절 게르마니아에 부임했습니다. 게르마니아 군단이 적으로 돌볼까 두려워하던 갈바는, 설령 적이 되더라도 무능한 지휘관이라면 오히려 안심할 수 있다고 판단해 비테리우스를 파견했다고 전해집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갈바의 지지 기반이 약했던 만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게르마니아 군단은 갈바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비테리우스를 앞세워 로마로 진군했습니다.

갈바는 인기 있는 피소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이것이 오토의 분노를 샀습니다. 오토는 갈바와 피소를 암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뒤, 비테리우스에 맞서기 위해 도나우 군단을 소집했습니다.

두 군대는 실제로 이탈리아 북부 베드리아쿰에서 격돌했고, 승리는 게르마니아 군단을 이끈 비테리우스의 손에 돌아갔습니다.

전투의 내용은 대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능한 지휘관들끼리의 싸움이었다 보니, 서로에게 큰 피해를 남긴 채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이때 비테리우스는 도나우 군단을 모욕적으로 대했는데, 이것이 훗날 복수의 불씨가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공화정의 영웅 카이사르는 적대했던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을 용서했고, 자신의 병사들을 경멸하지 않았습니다. 적이더라도 모두 같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테리우스는 영웅도 아니었고, 그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이후 오토는 자살을 택했고, 비테리우스는 황제가 되었습니다.

황제 비테리우스

비테리우스는 갈바가 예상했던 대로 완전히 무능한 황제였습니다.

황제가 된 순간부터 그는 오직 놀기만 했습니다.

검투사 경기를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푹 자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용서받을 수도 있겠지만, 로마 황제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보였습니다.

당시 시리아에서 유대 전쟁을 진압 중이던 베스파시아누스를 대신해 로마로 진군한 프리무스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비테리우스는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고, 그의 시신은 티베르강에 던져졌습니다.

비테리우스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비테리우스는 평가할 가치조차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아첨의 달인이었고, 요직을 잘 활용해 승승장구하는 유형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이 유능하다는 판단은 성립하지 않으며, 비테리우스는 그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이런 인물이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로마가 얼마나 깊은 혼란에 빠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