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누스 황제가 죽자 요비아누스가 잠시 제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인물이 바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입니다.
로마 제국 최초의 게르만계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
로마인의 강점은 적이라 여겼던 자들마저 동화시켜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왕정 시대부터 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를 이끌어 왔다면, 로마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게르만족이 드디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오늘날 헝가리 일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부근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대부터 로마군 지휘관으로 활약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많은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 안에 살고 있었고, 병사와 게르만족이 서로 적으로 싸우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에도 수행했으며, 도중에 사망한 요비아누스의 뒤를 이어 차기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숙적인 게르만족임에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그였기에, 기독교 병사들을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즉위하자마자 동생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삼았고, 이후 발렌티니아누스는 제국의 서부를, 발렌스는 동부를 담당하게 됩니다.
발렌티니아누스의 통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게르만족과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프랑크족
- 부르군트족
- 반달족
- 알레만니족
- 픽트족
- 스코트족
- 앵글족
- 색슨족
- 고트족
이들이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와 맞선 부족들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중세의 주역이 되고, 오늘날 세계의 주인공이 된 민족들이기도 합니다.
그는 잘 싸웠지만,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게다가 그 휘하에서 싸운 병사 대부분 역시 게르만족이었으니, 적도 아군도 모두 게르만족인 셈이었습니다.
전투 외에 그가 남긴 업적으로는 율리아누스의 정책을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노선, 즉 기독교 우대 정책으로 되돌린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기독교 교파 간 분쟁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은 듯하지만, 반기독교 세력에 대한 단속에는 철저했고, 로마 원로원 의원 살해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일설에는 로마 원로원 의원의 3분의 1이 황제 반역죄로 처형되었다고도 합니다. 이후 기독교 계열의 역사서들이 이를 비난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신에게 헌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죽이면 죄인이지만, 전쟁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 이것이 채플린의 말이었던가요? 발렌티니아누스는 신성한 기독교를 널리 퍼뜨리는 데 기여한 인물이었으니, 기독교도가 아닌 자는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지요.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375년, 헝가리(판노니아)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합니다.
게르만 민족 대이동
서기 375년, 세계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그 '게르만 민족 대이동'이 시작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글로 다루겠지만, 북쪽에서 몽골계 기마민족 훈족이 밀려온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훈족은 흉노와 같은 계통으로 보이며, 일본인과도 혈연관계가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훈족 때문에 훗날 '황화론(黃禍論)'이 제기되지만, 그야말로 천 년 넘게 지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게르만족은 훈족을 피해 도망치다 못해, 대신 로마 제국으로 대규모 침입을 감행합니다. 이전까지의 침입은 마을이나 도시를 습격해 약탈하고 돌아가는 수준이었지만, 이번에는 문자 그대로 '이주'를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가 하필 발렌티니아누스의 죽음과 겹치고 맙니다.
발렌스
발렌스는 발렌티니아누스의 동생이라는 점 외에는 특별히 두드러진 특징이 없는 황제였습니다. 발렌티니아누스 황제 사후에도 동방 황제로서 제위를 유지했으며, 율리아누스의 외척인 프로코피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고트족에게 영토 내 거주권을 허락했습니다.
고트족에게 국경 방어를 맡긴 듯했지만, 결국 고트족의 반란으로 벌어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고 맙니다. 이는 로마 건국 이래 최대의 참패라 할 수 있습니다.
황제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라티아누스는 불과 8세에 제국 서부의 황제로 즉위합니다. 왕조의 말기마다 어린 황제가 옥좌에 앉게 되는데,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렌스 황제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라티아누스가 그 뒤를 이어받게 됩니다. 이때 그는 광대한 로마 제국을 혼자 통치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테오도시우스를 동방 황제로 임명합니다.
테오도시우스는 아버지 대에서 활약한 장군 테오도시우스의 아들로, 사실 그의 아버지는 그라티아누스에 의해 처형된 인물이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황제 즉위의 조건으로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요구했고, 그라티아누스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라티아누스는 황제가 되기 전인 15세 무렵,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손녀인 콘스탄티아와 결혼했습니다.
그가 남긴 행적이라곤 테오도시우스를 동방 황제로 세운 것 외에, 최고 신직(Pontifex Maximus) 직위를 거부한 것과 로마 원로원에서 승리의 여신상을 철거한 것 정도입니다. 이는 사실상 로마의 신들을 부정하고, 로마 황제 스스로 야훼(YHVH)에 의한 통치 질서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보였습니다. 이 시대의 제국은 이미 로마 제국이 아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83년, 브리타니아에서 막시무스 장군이 군사를 일으키자 그라티아누스는 이를 토벌하러 나섰지만, 부하들의 배신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두 번째 아내 유스티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열성적인 아리우스파 신봉자였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타나시우스파가 우세했지만, 상식적으로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아리우스파가 실제로는 다수였습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죽자, 불과 4세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그라티아누스의 공동 황제가 됩니다. 이름뿐인 황제였지만 그래도 황제는 황제였던지라, 형을 죽인 막시무스를 황제로 인정하는 화평 조약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침공해 온 막시무스를 피해 도망치다 결국 테오도시우스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누이동생을 테오도시우스에게 시집보냅니다. 막시무스를 타도한 테오도시우스는 로마 황제의 지위를 회복했지만,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의 괴뢰에 불과했고, 392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테오도시우스가 그를 죽였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네 황제의 통치에 대한 평가
발렌티니아누스 1세를 제외한 나머지 황제들의 통치 기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통치는 게르만족 대책에만 매달렸고, 정작 게르만족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황제도 탄생했고, 이름만 로마 황제인 황제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의 암약도 한몫했지만, 로마 황제는 사실상 기독교 세력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의사결정 기구였던 원로원이 무력화되고, 상징인 승리의 여신상이 철거된 시점에서 로마는 이미 멸망했다고 봐도 좋습니다. 남은 것은 로마의 껍데기일 뿐입니다.
제국은 테오도시우스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가속화됩니다. 누구나 아는 그 로마의 멸망은, 사실 모두에게 이미 명백히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