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시작한 사두정치(테트라키아) 체제에서 갈레리우스는 동방의 부제(副帝)로 임명되어, 전임 황제들이 은퇴한 뒤 정식 황제로 즉위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기독교 박해자'라는 오명과 함께 회자되곤 하는데, 과연 그는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일까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제로 임명되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처음에 막시미아누스를 서방의 공동 황제로 세워 제국을 통치했지만, 광대한 제국을 두 사람만으로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에 293년 체제를 확장해 각 황제 아래에 부제를 하나씩 두는 사두정치를 완성했습니다. 이때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동방 부제로 발탁된 사람이 바로 갈레리우스였습니다.
갈레리우스의 출생에 대해서도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불가리아 일대, 즉 발칸 지역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우렐리아누스와 카루스 황제 시절에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발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며 부제의 지위에 올랐고, 발칸 반도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관할 구역은 중동 지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는 로마의 숙적인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서기 296년, 갈레리우스는 사산조 왕 나르세에게 패배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상실하고 만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아르메니아에 친로마 성향의 왕을 세우는 데 성공했고, 298년에는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사산조군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그는 적의 수도 크테시폰까지 점령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되찾았습니다.
황제 즉위와 혼란의 시작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은퇴하면서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와 함께 정식 황제(아우구스투스)로 즉위했습니다. 그의 심복인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와 조카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각각 부제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인사에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선대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였습니다. 그는 원로원의 지지를 등에 업고 수도 로마에서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며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서방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급서하자, 그의 아들 콘스탄틴이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됩니다. 갈레리우스는 이를 무력으로 억누르기보다는 콘스탄틴을 부제로 인정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판단했고, 사실상 그의 지위를 용인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명의 황제와 황제 자칭자가 난립하면서, 사두정치는 더 이상 평화로운 분업 체제로 유지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황제들끼리 서로 싸우는 내전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최초의 충돌은 막센티우스와 전 황제 막시미아누스 진영, 그리고 황제로 승진한 세베루스와 갈레리우스 진영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노구를 이뤘지만 여전히 군사적 재능이 확실했던 막시미아누스 앞에서 새로 즉위한 세베루스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세베루스는 포로로 잡혀 로마로 끌려간 뒤 처형되고 만니다.
갈레리우스는 직접 이탈리아로 진격했지만 실패했고, 대신 리키니우스를 서방 황제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세는 이미 깊어져 있었고, 결국 311년 세상을 떠납니다.
갈레리우스에 대한 평가
갈레리우스의 역사적 평가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에 벌어진 기독교 대박해에 그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공화정 시대에 비해 문화적으로 쇠퇴한 면모가 있었고, 기록을 남기려는 노력도 드물었습니다. 게다가 남은 사료의 상당수가 박해를 당한 기독교인들의 손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에 대한 혹평이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록들에 따르면 갈레리우스는 로마 시민들에게는 냉담했으면서 고향 발칸 출신 인재들을 특별히 후대하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시기 로마 황제들의 출신지는 발칸 반도로 이동하는 추세였으므로, 어느 정도는 그럴듯한 지적입니다.
로마 황제의 출신지를 살펴보면, '오현제' 시대까지는 대체로 이탈리아 출신이 많았고, 이후 스페인, 세베루스 왕조 때는 북아프리카, 그리고 군인황제 시대 말기부터는 발칸 반도 출신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럼에도 갈레리우스 자신의 통치가 특별히 무능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시대에 내전이 벌어진 근본적인 원인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설계한 사두정치 체제 자체가 비합리적이었고, 후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막센티우스나 콘스탄틴 같은 야심가들이 난립할 수밖에 없었고, 갈레리우스는 병석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분할 통치에 성공한 정권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던 몽골 제국 역시 분열을 거듭하다 결국 소멸했습니다. 네 명의 황제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는 체제와,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는 전제 체제는 본래부터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전제정치는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강력한 인물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시대에, 갈레리우스의 정적이었던 콘스탄틴이 그런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어쩌면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서 콘스탄틴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시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