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훌륭한 남자가 되지 못한 남자! 로마 제국 제24대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비극

훌륭한 남자가 되지 못한 남자! 로마 제국 제24대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비극

영웅이나 걸출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에는 관료형 영웅이나 군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인물이지만, 나라를 구하고 백성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되지는 못합니다.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매우 재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의 통치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영웅 혹은 걸출한 지도자에게 필요한 카리스마와 행운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황제 즉위와 선정(善政)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꼽히는 엘라가발루스와 마찬가지로 율리아 메사의 손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엘라가발루스와 혈연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온화하고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할머니 율리아 메사가 임명한 로마의 저명한 법학자 울피아누스의 보필 아래, 그는 즉위 후 처음 6년간 놀랄 만큼 훌륭한 통치를 펼쳤습니다.

그는 원로원에서 명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계보를 잇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통치 기간 내내 단 한 명의 원로원 의원도 숙청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이름을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더 아우구스투스'로 변경하며 그 뜻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율리아 메사는 엘라가발루스 때처럼 정무에 앞세워지지 않고, 조용히 이면에서 실을 당기는 역할에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니 율리아 마메아가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원로원은 새롭게 즉위한 알렉산더를 환영했고, 겨우 14세에 불과한 소년 황제에게 모든 존칭과 권한을 아낌없이 부여했습니다. 엘라가발루스가 로마에 들여온 오리엔트풍의 요소들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울피아누스의 주도 아래 로마 본래의 전통적 정치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각종 인프라 건설에 적극적으로 착수했고, 식량 안보와 치안 대책을 주도하여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다만 로마법의 최종 결정권을 각 속주 총독에게 위임한 부분은 후대에 잘못된 통치로 자주 지목됩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그 책임은 알렉산더가 아니라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로마 시민권자라면 누구나 로마 법정에 항소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은 법률로 철저히 보호받았으며, 유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확고하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로마 시민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본국에서 이를 모두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로마 시민들은 이 항소권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실정은 없었고, 즉위 초반 6년간의 통치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로마는 오랜만에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율리아 메사의 죽음과 울피아누스 암살

할머니 율리아 메사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국정의 톱니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메사는 폭군 엘라가발루스를 만든 장본인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반성하고 알렉산더의 선정을 뒷받침해 준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로마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메사를 대신해 권력을 쥔 것은 어머니 마메아였습니다. 그녀는 황후 살루스티아를 축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더 자신은 진지하고 유능한 황제였지만, 어머니의 행보 탓에 민심을 잃을 위험에 처했습니다. 이 점은 훗날 닥칠 비극의 복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리 인기가 많은 지도자라도 '어머니 바라기'처럼 보이면 곤란한 법입니다.

마메아는 메사의 영향력을 완전히 지우는 데 집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근위대장 울피아누스가 근위병들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

울피아누스는 근위대의 수장이었음에도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지휘 체계가 얼마나 심각하게 흔들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이 군단 지휘 체계의 붕괴는 알렉산더에게 치명적인 재앙을 가져옵니다.

유명한 역사가이자 원로원 의원인 카시우스 디오는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로마를 떠나 역사 저술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강적, 사산조 페르시아의 등장

앞서 말했듯이 알렉산더는 운이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의 통치 기간 중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새로운 강력한 적인 사산조 페르시아가 탄생했습니다.

로마 황제들의 첫 번째 숙제는 언제나 파르티아와의 관계였습니다. '오현제'로 불리는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들조차 즉위 시 파르티아 제국을 어떻게 다룰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역대 황제들은 아르메니아 왕국을 완충지대로 활용하며 위기를 넘겨 왔습니다.

훌륭한 남자가 되지 못한 남자! 로마 제국 제24대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비극

그러나 파르티아와 달리 사산조 제국은 훨씬 호전적이었습니다. 사산조는 바로 이 시기에 로마 영토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사산조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알렉산더는 사산조와 강화를 맺은 뒤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역사가들은 하나같이 알렉산더가 사산조에 패배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중 헤로디아누스는 "황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원정에서 추위, 험준한 산악 지형, 역병으로 수많은 병사를 잃었다"고 전합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사산조의 침공을 저지했다는 사실 자체는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물론 그는 트라야누스 같은 명장이 아니며,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어쨌든 원로원은 알렉산더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음껏 기분을 내던 것은 군대를 도나우 강 방면으로 돌려 게르만 전선으로 향하게 한 때였습니다.

물론 어머니 율리아 마메아와 함께...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비극

알렉산더는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지키고 따라야 할 자신의 군대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번에는 원로원이나 근위대가 아니라, 일반 병사들에게 공공연하게 살해당한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게르만족과의 전투를 회피하고 강화 조약을 맺으려 했다는 데 병사들이 불만을 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 무렵에는 논리 같은 것이 통할 리 없었습니다.

근위대장 울피아누스가 근위병들에게 살해당했듯이, 로마 군대의 최고 사령관인 황제마저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것입니다.

로마는 이미 힘이 곧 정의인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공화정의 빛나던 이상도, 민주주의의 정신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폭력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알렉산더의 죽음과 함께 로마는 '군인 황제 시대'라 불리는 대혼란으로 치닫습니다. 서기 235년. 악명 높은 3세기의 위기는 이제 끝나지 않습니다.

로마의 제1시민, 프린켑스(princeps)가 죽었습니다. 대체 왜일까요?

아마도 그가 너무나 어린아이 같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를 습격한 병사들은 이렇게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젖 떼지 못한 녀석!"

실제로 알렉산더는 어머니와 함께 살해당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겨우 26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