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 192년, 폭군 코모두스가 암살되면서 로마 제국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근위대의 옹립으로 즉위한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근위대의 손에 살해당했고, 이어진 사태는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근위대는 말 그대로 '다음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친 것입니다.
결국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거액을 제시하고 황제로 선출되었지만, 이 조롱 같은 선거에 분노한 각 속주의 총독들이 잇달아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했습니다.
-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 판노니아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들은 모두 현군으로 칭송받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직접 임명한 인물들이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아우렐리우스가 생전에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죠. 로마는 속주들이 서로 판을 벌이는 내전의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
황제를 자칭한 총독들 가운데 가장 빠른 발걸음으로 로마에 도착한 이는 바로 판노니아(오늘날 헝가리 일대) 총독 세베루스였습니다. 지리적으로 로마와 가까웠던 점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결단력과 행동력이 남다랐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세베루스의 기세에 완전히 겁먹은 율리아누스는 그에게 공동 통치를 제안했지만 세베루스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결국 율리아누스는 세베루스를 두려워한 원로원과 근위대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세베루스는 로마에 입성한 뒤 황제 암살에 가담한 근위대를 해산하고,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로마 황제가 됩니다. 이로써 세베루스 왕조가 개막됩니다.
하지만 로마를 손에 넣었다고 해서 적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베루스는 동방으로 진격하여 시리아 총독 니게르를 토벌하기로 결심합니다.
제위를 둘러싼 항쟁
세베루스는 브리타니아 총독 알비누스와 손잡고 동방으로 향했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인 시리아를 지키는 니게르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습니다. 실제로 첫 교전에서는 세베루스 군이 패배를 당하기도 했는데, 북방에서 단숨에 남하한 병사들이 기후 차와 피로에 시달렸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니게르는 세베루스에게 권력을 나누어 함께 다스리자는 제안을 보냈지만, 세베루스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결정적 전투는 이소스에서 벌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백중세를 이루었지만 최종 승리는 세베루스의 것이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이소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격돌했던 바로 그곳입니다. 대군끼리 충돌할 수 있는 넓은 평야가 흔치 않다 보니, 세계사에서는 같은 장소에서 여러 차례 대전투가 벌어진 사례가 종종 있습니다.
니게르는 패전 후 도주했지만 결국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동방의 적을 제거한 세베루스의 앞에는 이제 서쪽의 알비누스가 남아 있었습니다.
양군은 오늘날 프랑스 리옹 인근, 당시 이름으로 루그두눔 일대에서 격돌했습니다. 결과는 세베루스의 대승이었고, 알비누스는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세베루스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세계사에서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즉위를 기점으로 세베루스 왕조가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이 시대 이후 원로원은 유명무실한 껍데기로 전락했고, 무력을 가진 자가 정치를 주도하는 군인 황제 시대의 막이 열렸습니다.
황제가 된 세베루스가 처음 한 일은 전임자 코모두스에 대한 기록 말살 처분을 철회한 것이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명군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또한 그는 원로원에 자신의 아들 카라칼라를 '지정 황제'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함으로써, 사실상 아들을 차기 황제로 확정 지었습니다.
세베루스는 고향인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에 대규모 공공 건설을 벌이는 등 친인척을 후하게 대우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고향에 공공사업을 몰아준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원로원은 완전히 세베루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았고, '첫 번째 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어 오던 공화정의 외피는 여기서 사라지고, 임페라토르와 카이사르라는 절대 군주의 면모가 드러났습니다.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세베루스는 가차 없는 숙청을 단행했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이제 누구도 세베루스에게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병으로 쓰러지다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세베루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브리타니아 원정 중이던 211년, 에보라쿰(오늘날 영국 요크)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종 직전 그는 사랑하는 아들 카라칼라를 침상으로 불렀습니다. 세베루스는 아내 율리아 도므나와 아들 카라칼라, 게타를 깊이 사랑했으며, 제국 곳곳에 가족의 초상화를 걸어두기도 했습니다.
그가 아들들에게 남긴 유언은 "형제끼리 화목하게 지내고, 병사들을 풍족하게 하며, 나머지 모든 이는 무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이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살해했고, 제국 전역에 걸려 있던 가족 초상화에서 게타의 얼굴은 지워졌다고 전해집니다.
세베루스는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황제의 자질이 없는 사람을 후계자로 세운 것입니다. 로마는 이제 미끄러운 비탈길을 굴러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막을 사람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