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로마 내전의 정점, 사회전쟁! 원인과 결과 완벽 정리

교과서 한 줄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전쟁

야마카와 출판사의 세계사 용어집은 '사회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91년~88년,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시(同盟市)들이 로마 시민권을 요구하며 일으킨 반란. 반란 세력은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시민권 부여를 약속받은 뒤 진압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저는 이 문장을 몇 번을 읽어도 의미가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어쩐지 점수는 받았죠. 고등학생에게 세계사란 어디까지나 점수를 따기 위한 도구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역사는 단순한 암기 과목이 아닙니다. 이번 글에서는 사회전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해 보겠습니다.

동맹시란 무엇인가?

로마사는 포에니 전쟁을 기점으로 크게 나뉩니다.

포에니 전쟁 이전에는 '속주(屬州)'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로마는 건국(기원전 8세기) 이후 여러 전쟁에서 승리해 왔는데, 정복한 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대신 '동맹시'로 대우했습니다.

동맹시의 주민들은 라틴 시민, 혹은 '이탈리아 동맹자'라고 불렸으며, 포에니 전쟁과 같은 전쟁 때는 로마의 지휘 아래 병력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전쟁 이후 세계적 국가가 된 로마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 이후 정복지의 토지를 로마 시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빌려주었습니다. 그 결과 대토지 경영(라티푼디움)이 확대되고 빈부 격차가 커졌지만,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로마 시민에게 군 복무는 의무가 아닌 자원 입대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동맹시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로마 시민이든 라틴 시민이든, 군 복무는 곧 직접세이자 의무였고, 동시에 긍지이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동맹시는 로마 시민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명예를 위해 싸워왔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군 복무를 수행하는 대등한 관계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균형은 완전히 깨져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로마 시민들은 여전히 특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로마가 한니발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의 동맹시도 한니발에게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맹시들은 로마를 운명공동체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제는 무너졌습니다. 라틴 시민들이 로마 시민과 같은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명실상부한 내전

로마사에서 기원전 1세기는 '내전의 시대'로 불립니다만, 로마 본토와 동맹시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위기'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국난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기원전 91년,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호민관이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드루수스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계승하여 동맹시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드루수스는 암살당했습니다.

분명 원로원 측 인물들의 소행이었겠죠. 그야말로 부패한 정치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동맹시 지도자들은 이 소식을 듣는 즉시 각 도시에서 연합하여 일제히 봉기했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초록색 부분이 로마, 붉은색 부분이 라틴 동맹(반란 세력)의 영토입니다.

로마 내전의 정점, 사회전쟁! 원인과 결과 완벽 정리

전쟁은 갈수록 격화되었습니다.

로마가 세계 각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장과 전술의 우위가 크게 작용했지만, 상대가 동맹시라면 장비와 전술의 질이 완전히 같았습니다. 같은 로마식 군단끼리 싸우는 셈이었으니,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술라의 활약과 율리우스 법

전환이 로마 쪽으로 기운 데에는 로마측의 뛰어난 지휘관 술라의 성공적인 활약도 한몫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루키우스 율리우스의 '율리우스 법(Lex Julia)'이 라틴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전쟁은 종결로 향하게 됩니다.

분명 이것은 율리우스의 공적입니다. 그런데 야마카와 교과서에서는 이 업적이 술라의 것처럼 서술되어 있어 수험생들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참고로 이 율리우스의 본명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우리가 잘 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숙부입니다.

사회전쟁 이후

로마 시민권자의 확대는 평민회(플레브스 회의)의 지위 하락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는 놀랄 일이 아닙니다.

로마 시민만으로 안건을 결정하던 시절과 달리, 참가자 수가 방대해지면 의견이 좀처럼 모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아테네 시민들만으로 운영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이탈리아 전역을 아우르는 규모에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 확대를 추진했던 호민관들에 의해 오히려 평민회의 지위가 낮아졌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할 만합니다.

그 결과 원로원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평민의 지위는 하락했습니다.

실제로 로마 공화정은 약 반세기 후에 막을 내렸고, 그 후 민주주의의 부흥은 약 1700년 뒤 영국에서야 비로소 실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