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구르타 전쟁(Jugurthine War)은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왕국과 로마 공화정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누미디아는 '기마민족의 나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세력이었습니다. 알프스를 넘어온 한니발은 누미디아 기병대와 함께 로마군을 압도했고, 반대로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왕과 손을 잡은 스키피오는 한니발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이후 누미디아는 오랫동안 로마의 충실한 동맹국으로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야망에 눈먼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
유구르타는 당시 누미디아를 다스리던 왕의 이름입니다.
기원전 149년, 스키피오의 오랜 동맹이었던 마시니사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의료 수준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장수한 셈입니다.
마시니사 사후 누미디아는 세 명의 왕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영토가 셋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행정 권한이 셋으로 분담된 형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위는 장남 미칩사가, 군사력은 차남 굴루사가, 나머지 권한은 삼남 마스타나발이 맡았습니다. 로마와의 동맹 관계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이른바 '소 스키피오'를 통해 계속 이어졌고, 누미디아는 북아프리카 최강의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유구르타는 삼남 마스타나발의 서자였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던 그는 누미디아 왕의 명을 받아 소 스키피오 휘하의 로마군에 참전해 큰 활약을 보였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누미디아 국왕에게 유구르타를 극찬하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공로 덕분에 왕 미칩사는 유구르타를 양자로 들였습니다.
그로부터 14년 후, 유구르타의 야욕이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배경에는 스키피오 가문의 몰락이 있었을 것입니다. 소 스키피오는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났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탄압한 여파로 스키피오 나시카는 국외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들이었던 그라쿠스 형제는 원로원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스키피오 가문과 누미디아 왕가는 로마식 후원자(patronus)와 피후호자(cliens)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스키피오 가문이 사라진 상황에서 유구르타 입장에서는 로마를 섬길 명분이 크게 약해졌을 것입니다. 국가의 쇠퇴를 걱정해 개혁에 나선 두 젊은이를 공공연히 죽이는 로마에게 환멸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같은 시기에 동맹시 전쟁, 미트리다테스의 반란, 시칠리아 노예 반란 등 로마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118년, 누미디아의 왕 미칩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로마 원로원에 후견을 요청했고, 유구르타와 자신의 두 아들 사이의 공동 통치를 구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유구르타는 두 상속자와 무력 충돌을 벌여 승리했고, 미칩사의 아들 중 힘살은 살해당했으며, 아드헤르발은 로마로 피신했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나라를 동서로 나누는 화해안을 권유했고, 유구르타는 일단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5년 후 그는 다시 미칩사의 아들들에게 전쟁을 일으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선왕의 두 아들은 모두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때 누미디아에 거주하던 라틴인들도 희생된 것으로 보이며, 로마는 누미디아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때는 기원전 112년, 유구르타 전쟁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유구르타 전쟁과 로마의 부패
로마는 집정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를 누미디아에 파견했습니다. 유구르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로마 측에 항복을 제안했고, 이에 따라 직접 로마로 건너가 답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 체류 중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던 사촌을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 사건이 발각되면서 유구르타는 로마에서 추방당했습니다. 로마는 다시 누미디아 침공에 나섰지만, 이번 침공은 로마 측의 실패로 끝납니다. 로마군은 무장 해제 상태로 귀국할 처지에 놓였는데, 당시 로마 측 인물을 매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전환이 어긋나 있었습니다.
로마는 다시 집정관 메텔루스를 파견해 누미디아 진압에 착수했습니다. 한때 로마 군단에서 복무하며 전술을 익혔던 유구르타와의 전투는 난전이 되어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유구르타는 평지에서의 정면 대결을 끝까지 피하고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메텔루스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문제는 로마 진영 내부에도 있었습니다. 사령관 메텔루스와 부관 사이의 의견 불일치로 지휘부의 결속력이 흔들렸고, 메텔루스는 부관이 제안한 작전을 번번이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 부관은 스스로 지휘관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필자의 눈에는 강탈처럼 보이지만, 민주적으로 말하면 그 부관은 로마로 돌아가 집정관에 선출된 것이었습니다.
그 부관의 이름은 바로 가이우스 마리우스였습니다.
기원전 107년, 집정관이 된 마리우스는 누미디아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어 유구르타와 정면으로 맞서게 됩니다. 마리우스는 용맹한 유구르타를 상대로 쉽게 승기를 잡지 못했지만, 코르넬리우스 가문 출신의 술라의 활약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마우레타니아 왕 보쿠스가 유구르타를 배신하면서 술라는 전장이 아닌 회담 자리에서 유구르타를 생포하는 데 성공합니다.
로마로 끌려간 유구르타는 마리우스의 개선식에서 도성을 끌려 다니다 처형당했습니다.
이 전쟁에는 구원도 교훈도 없었습니다. 오직 부패와 권력 다툼만이 남았습니다. 한때 이상적인 국가라고 일컬어지던 로마는, 이미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