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 채용 시험이나 공무원 시험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인 "메세나 활동"의 어원은 바로 이번 글의 주인공인 가이우스 마에케나스(Gaius Maecenas)입니다.
"마에케나스(Maecenas)"를 프랑스어로 읽으면 "메세나(Mécène)"가 되며, 여기서 문화·예술을 후원한다는 뜻의 일반 명사로 굳어졌습니다.
메세나 활동이란 기업이 문화·예술 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투자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에케나스가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같은 당대 최고의 시인들을 보호했던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황제의 왼팔
군사와 정치 분야에서 활약한 아그리파가 황제의 '오른팔'이라면, 외교 분야에서 활약한 마에케나스는 황제의 '왼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에케나스는 아그리파나 아우구스투스처럼 에퀴테스(기사 계급) 출신이었지만, 그 혈통은 에트루리아인에게서 찾을 수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인보다 더 오래된 혈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출생 연도는 기원전 70년경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보다 약 7살 위라는 뜻입니다.
아우구스투스와 마에케나스가 언제부터 긴밀한 관계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필리피 전투 무렵에 만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에케나스는 소위 명예로운 관직 진출 코스인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을 과감히 포기하고 아우구스투스를 섬겼으며, 한마디로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비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인에게 프라이토르(법무관)나 집정관 같은 요직을 맡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었고, 그 자리에 오르면 원로원 의석을 얻게 됩니다. 당시 기준으로 이를 스스로 내려놓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에케나스의 활약은 현대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로마의 공식 문서에 그의 이름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가 무대 뒤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그림자 실력자'처럼 활동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의 구체적인 업적으로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간의 타렌툼 협약 체결에 서명하여 제2차 삼두 정치를 성립시킨 것이 있으며, 옥타비아누스가 폼페이우스의 유자들과 안토니우스와 싸우는 동안 로마에서 그를 대리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시기 옥타비아누스가 여러 곳에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마에케나스의 도움이 컸다고 하며, 많은 연구자들은 그를 '그림자 속 공신'으로 평가합니다.
악티움 해전 이후 마에케나스의 행적은 완전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잠시 옥타비아누스와 불화가 있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의 그림자 속 두뇌로 남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종종 마에케나스의 집에 머물며 정책에 대해 논의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로마의 정당성을 노래한 베르길리우스의 대서사시 '아이네이스' 집필을 주문한 것도 바로 마에케나스였다고 합니다.
마에케나스는 기원전 8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언장에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넘기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의 수호자

앞서 언급했듯이, 마에케나스는 무엇보다 시인들의 든든한 보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철학은 그리스에서 발달했고, 시는 로마에서 꽃피웠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단테는 이 시기에 활약한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깊이 존경하여, 자신의 걸작 '신곡'에 베르길리우스를 등장시켰습니다.
로마 3대 시인으로 꼽히는 오비디우스와 호라티우스 역시 마에케나스의 보호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 문화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훗날 마에케나스를 본받아 예술을 후원한 귀족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며, 나아가 르네상스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원이 없었다면 예술의 발전도 없었을 터, 마에케나스가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로마의 공식 기록에는 거의 이름이 남지 않았지만, 마에케나스가 후세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그가 세계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