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제국은 크게 두 시대로 구분됩니다.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연 프린시파테(원수정) 시대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개창한 도미나테(군주정) 시대입니다.
이번 글의 주제인 프린시파테, 즉 '제1기 로마 제국'을 설명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프린시파테 자체가 일종의 장대한 '속임수'였기 때문입니다.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교묘하게 보여준 하나의 환상이었던 셈입니다.
앞서 동양과 서양의 '황제' 개념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동양의 황제 개념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한 도미나테에 가깝고, 프린시파테는 어느 의미에서 그와 거리가 먼 체제였습니다. 지금부터 이 '프린시파테'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프린켑스', 오랜 역사를 지닌 칭호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를 읽다 보면 '프린켑스(Princeps)'가 곧바로 황제를 가리키는 말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이 단어 자체는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프린켑스 세나투스(Princeps Senatus, 원로원 수석 의원)'는 원로원의 실질적 지도자를 뜻하는 칭호였습니다.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르타고 파괴를 주장한 대(大) 카토 같은 인물들이 원로원 최고의 중진으로서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불렸습니다.
이 칭호는 독재관(디크타토르)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원로원과 공화정을 존중하면서 원로원을 이끄는 인물이라는 의미가 훨씬 강했습니다.
원로원을 존중하는 태도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왜 암살당했는지 깊이 곱씹었습니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브루투스 등 40명이 넘는 인물이 암살에 가담했는데, 이들은 카이사르를 미워해서라기보다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카이사르 본인이 종신 독재관으로서 독재 체제를 추진하려 했고, 그것이 원로원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와 달리 원로원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프린켑스 세나투스(원로원의 제1인자)', '프린켑스 키비타티스(로마 시민의 제1인자)'라 칭하며, 원로원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공화정을 존중하고 지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동양의 전제 군주와는 매우 다른 겉모습이지만, 정작 권력의 실질적인 내용은 놀랄 만큼 비슷했습니다.
호민관 특권과 임페리움
카이사르는 하지 못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할 수 있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호민관(트리부누스)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명문 귀족이 아니라 기사(에퀴테스) 계급 출신이었기에 스스로 호민관이 되어 그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호민관 특권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신체의 신성불가침성과 거부권(베토)입니다.
특히 거부권은 막강했습니다. 이 권한 덕분에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거부권 개념은 20세기에 창설된 유엔에도 도입되어, 지금도 5개 상임이사국이 강력한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원래 호민관의 임기는 1년이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교묘하게 '1년마다 자동 갱신' 방식으로 바꿨습니다. 이 발상은 오늘날 많은 기업이 상업 활동에 활용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는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의 허락 없이는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다는 뜻이었지만, 너무나 교묘하게 설계되어 당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옥타비아누스가 키케로를 가장 먼저 숙청 대상으로 여겼던 것도, 그가 지나치게 현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는 이 무렵 내전으로 수많은 걸출한 인물들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강력한 권한이 바로 임페리움(Imperium)이었습니다. 현대적으로 번역하면 '최고 사령관'에 해당하는데, 문자 그대로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의미합니다.
이 권한 자체는 과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도 가졌던 것으로, 원래 집정관에게 1년 임기로 주어지던 권리였습니다. 로마 공화정의 전통에서 집정관이나 법무관을 지낸 뒤 속주 총독(프로콘술)이 되는 과정이 '쿠르수스 호노룸(명예로운 관직의 길)'이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임페리움을 통해 로마 본토는 물론 속주에서까지 군사권을 손에 넣으며 사실상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내정과 군사 권력이 모두 옥타비아누스 한 사람에게 집중된 것입니다. 훗날 영어가 정립되면서 '황제(emperor)'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임페리움을 지닌 자를 '임페라토르(Imperator)'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 계승되는 이름들
옥타비아누스의 최대 경쟁자였던 안토니우스는 18세의 옥타비아누스를 '카이사르의 이름을 물려받은 젊은이'라고 평했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그의 이름을 이었다는 것은, 곧 카이사르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 이후 로마 황제로 불리는 인물들은 모두 선대 황제의 양자가 되어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계승했고, '카이사르'는 황제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예컨대 '오현제'로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공식 명칭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로, 임페라토르와 카이사르의 이름을 모두 이어받은 것입니다.
독일어로 황제를 뜻하는 '카이저(Kaiser)'와 러시아어의 '차르(Tsar)'가 각각 카이사르의 독일어식·러시아어식 독음인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또한 원로원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여 내전의 혼란을 종식시킨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존칭을 헌상했습니다. '위엄 있는 자'라는 뜻으로, 이후 이 이름은 옥타비아누스를 가리키는 호칭이 되었고, 역대 황제에게도 전승되었습니다.
이처럼 '로마의 제1인자'를 자칭한 남자는 막강한 권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자신의 이름과 함께 역대 황제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프린시파테란, 공화정의 수호자이자 원로원의 지도자인 프린켑스가 원로원을 존중하며 정치를 펼치는 통치 형태를 말합니다. 후대 학자들은 공화정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군사권과 내정권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킨 체제라는 뜻에서 이를 '원수정(국가원수 체제)'로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로마의 제1기 제국, 즉 프린시파테 시대가 막을 올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