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적 재능이 없었던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옥타비아누스는 사실 군사적 재능이 없었습니다. 그의 지휘 능력은 로마 역사상 인물들을 통틀어 거의 최하위권으로 평가되며, 그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는 대체로 패배를 거듭했습니다.
그렇다면 옥타비아누스는 무능한 인물이었을까요? 답은 '아니다'입니다.
카이사르는 만능의 천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직접 군을 지휘해 연전연승을 거두며 로마 역사상 최강급 인물인 폼페이우스마저 격파했고, 정치 능력 또한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갈리아 전쟁기를 지금도 서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은 그의 위대함을 잘 보여줍니다.
당연히 그의 사람 보는 눈도 탁월했습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에 부관으로 활동하던 안토니우스나 레피두스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카이사르는 두 사람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지만, 나라를 짊어질 적임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옥타비아누스의 강점, 사람을 쓰는 능력
옥타비아누스의 강점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하려 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진정으로 훌륭한 군주는 사람에게 맡기는 법입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량은 모든 일을 몸소 처리하려다 실패했고, 반면 한나라의 개국군주 유방은 자신의 무능함을 잘 알았기에 대부분의 일을 타인에게 위임했습니다.
유방이 어느 날 한신이라는 장군에게 물었습니다. "장군은 몇 명의 병사를 이끌 수 있는가?" 한신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10만 명이 한계입니다만, 폐하는 백만이라도 이끌 수 있으시지요." 유방이 못마땅해하자 한신은 말을 이었습니다.
"폐하는 장수를 이끄는 장수이십니다."
옥타비아누스도 같은 유형의 인물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를 간파하고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그 증거로, 옥타비아누스는 언제나 군사적 재능을 지닌 청년 아그리파를 곁에 두고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
아그리파의 출생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기원전 63년경에 태어나 옥타비아누스와 같은 해 출생으로 추정되며, 에퀴테스(기사 계급) 출신이었고, 아버지 역시 같은 이름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로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 내전을 살아남은 인물 중 하나였다고 전해집니다.
18세가 될 때까지 전쟁에 참여할 수 없어 로마에서 군사적 실적을 쌓을 수 없었음에도, 카이사르는 그의 재능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아그리파는 상당히 어린 시절부터 카이사르의 눈에 띄어 그리스까지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카이사르는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로마로 돌아왔을 때, 로마는 안토니우스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자들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수립하자, 아그리파는 사실상 옥타비아누스를 대신해 군을 지휘하며 카이사르의 암살자들과 싸웠습니다.
아직 젊었기 때문일까요? 필리피 전투에서는 브루투스에게 패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안토니우스가 카시우스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연합군은 전체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아그리파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승리를 거두고,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격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세력을 몰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과 싸워 승리하며, 옥타비아누스에게 영광의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황제의 오른팔로서
안토니우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프린킵스(원수정) 체제를 시작합니다.
아그리파는 계속해서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로 활약하며 각지의 적대 세력과 싸웠고, 아우구스투스의 권력 기반을 착실히 넓혀갔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진심으로 신뢰하여, 자신과 동등한 호민관 특권과 임페리움(최고 군사 지휘권)을 부여했으며, 친딸이자 외동딸인 율리아를 아그리파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아그리파와 율리아는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보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무려 다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손주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주길 바랐지만, 첫째와 둘째 아들은 요절했고, 남은 아들 역시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도덕 규범을 어겨 추방당하는 비극을 겪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니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참고로 아그리파 본인은 율리아와 결혼하기 전, 키케로의 절친이었던 아티쿠스의 딸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율리아와 재혼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일이 잦았습니다. 아그리파 사후에는 사위였던 티베리우스를 딸 율리아와 이혼시키고, 대신 자신이 율리아와 결혼하게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혈통에 의한 세습을 집착하는 면모가 있었고, 이 때문에 상당히 강압적인 결혼을 강요하곤 했습니다. 아그리파 등은 전혀 불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티베리우스는 이에 반발해 한때 정치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손자들에게 버림받은 아우구스투스는 차기 황제로 아그리파를 생각했던 듯합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단 한 번도 병을 앓은 적 없던 아그리파는, 일찍부터 병약했던 옥타비아누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황제의 오른팔로서 아그리파는 파테논 신전을 비롯한 공공 건설 사업을 총괄하며, 군사 분야뿐 아니라 정치 분야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기원전 12년, 그는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아그리파에 대한 개인적 평가
아그리파는 군사와 정치 양면에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명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지휘 능력은 카이사르나 술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안토니우스에 필적할 정도였으며, 병약하고 군사에 약한 옥타비아누스를 도와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 완성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내란의 시대였던 기원전 1세기의 로마에는 산처럼 쌓여가는 배신과 야망이 있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아그리파는 배를 이끄는 선장 같은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는 그런 인물이 더욱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그리파 본인의 위대함은 물론이고, 이런 인물을 후계자 곁에 배치한 카이사르의 인간을 보는 안목 역시 우리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