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내전 1세기, 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가
중국의 삼국시대, 일본의 전국시대, 그리고 로마의 내전 1세기. 많은 역사 애호가들이 가장 열광하는 시대로 꼽히는 이 세 시대에는 놀랍도록 명확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외부의 적이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다는 점입니다.
“어떤 국가도 오래도록 안전할 수 없다. 밖에 적이 없으면 안에서 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 경구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뼈아픈 상처를 안겨 준 한니발 바르카가 남긴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말처럼, 로마는 숙적 카르타고를 정복한 뒤 곧바로 스스로에게 칼끝을 겨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부터 악티움 해전까지, 약 100년간 이어진 로마인들끼리의 전쟁, 이른바 ‘내전 1세기’의 여정을 지금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 내전 1세기의 배경
-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 폼페이우스의 시대
- 제1차 삼두정치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제2차 삼두정치와 악티움 해전
내전 1세기의 배경
기원전 8세기에 건국된 것으로 알려진 로마는 이탈리아 통일까지 무려 5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초기 로마는 북쪽의 에트루리아, 남쪽의 그리스계 식민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세력을 넓혀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정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칠리아의 그리스 식민 도시들과 충돌했고, 시칠리아 서부를 장악한 페니키아계 도시 국가 카르타고와의 전쟁, 즉 포에니 전쟁으로 번지게 됩니다.
거대 강국 카르타고와의 사투 끝에 승리한 로마는 시칠리아, 사르데냐, 스페인, 북아프리카를 손에 넣으며 더 이상 확장을 멈출 수 없는 세계 강국으로 도약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영토는 새로운 부와 함께 새로운 문제도 가져왔습니다.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산 밀은 값싸고 품질이 좋았고, 로마 곡물 시장에는 일종의 가격 파괴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 파도에 직접 휩쓸린 것은 로마의 중소 농민들이었습니다. 값싼 수입 곡물과 경쟁할 수 없던 자영농들은 몰락을 피할 수 없었고, 빚은 불어나고 경영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 틈새로 소수의 부유층이 토지를 독식하는 대토지 소유, 역사적으로 유명한 라티푼디움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기사 계급(에퀴테스)과 귀족(노빌레스) 등 특권층 일부의 번영과 함께, 수많은 로마 시민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의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바로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호플리트(중장보병)였습니다. 로마에서 직접세는 곧 병역 의무였고, 시민들은 자비로 무기를 갖춰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평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나라와 가족을 지키는 전사라는 사실이 그들 자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라티푼디움의 등장으로 많은 로마 시민이 재산을 잃으면서 이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재산이 없으면 장비를 마련할 수 없고, 당시 로마는 일정 재산 이하의 시민에게 병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였기 때문에, 포에니 전쟁 이후 병역 대상자 수는 뚜렷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원로원은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라티푼디움의 주인 다수가 다름 아닌 원로원 의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 속에서 일어선 것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였고, 기원전 133년 그들의 개혁은 내전 1세기의 막을 올리게 됩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세계사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지만 학생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그 핵심은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농지법’을 통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개혁은 실패로 끝납니다.
실패의 원인은 원로원 계급의 반발이 너무나 거셌기 때문입니다. 당시 원로원은 이미 민의의 보루가 아니라 하나의 이해관계 집단, 즉 기득권의 산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원로원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민주적인 절차가 아닌, 드러낸 암살로 분쇄했습니다. 농지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부자는 더 부유해졌으며, 빈부 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습니다.
로마군의 약체화도 뚜렷해졌습니다. 스페인 원주민들에게 패배를 거듭하고,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이 남하했으며, 시칠리아의 노예 반란이 상징하듯 민중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원로원은 기득권에 매달렸습니다.
자신을 방해하는 자는 제거한다. 모든 것은 공화정 유지라는 명분 아래에서! 명분이 용서하는 한, 눈에 거슬리는 세력은 차례차례 사라졌고, 이제 원로원의 폭주를 막을 어떤 존재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한 뒤, 로마 각지에서 반란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시칠리아에서는 10만 규모의 노예 반란이 일어났고, 북아프리카에서는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가 로마에 맞섰으며,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이, 서쪽에서는 스페인 민족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여기에 동쪽에서는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가 침입했고, 정점에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 동맹시들과 벌인 동맹시 전쟁까지—혼란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 위기를 해결한 인물이 바로 마리우스와 술라입니다.
마리우스는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킴브리 전쟁에서 약 30만에 달하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격파했습니다. 술라는 마리우스 휘하에서 부관으로 활약한 뒤, 동맹시 전쟁과 10만이 넘는 대군을 자랑하던 미트리다테스 왕의 침공을 저지하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로써 로마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사람들이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리우스와 술라가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민중파를 이끈 마리우스와 원로원파(옵티마테스)를 이끈 술라는 치열하게 격돌했고, 로마에는 비가 아닌 피가 쏟아졌습니다. 로마의 중심인 로마 포룸에 처형된 자들의 목이 늘어서는, 끝없는 내전이 계속되었습니다.
폼페이우스의 시대
마리우스와 술라가 세상을 떠난 뒤, 무대는 술라의 오른팔로 활약하던 폼페이우스에게 넘어갑니다.
폼페이우스는 20대에 이미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정리하고 지중해 해적 소탕 작전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그 기세 그대로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종결시키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래 이어져 온 안티고노스 왕조의 시리아를 멸망시켜 로마 영토로 편입했습니다.
이 시기에 로마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예 반란인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일어났지만, 역시 술라의 부하 출신인 크라수스가 이를 진압하면서 노예와 민중의 반란은 잦아들었고, 내전도 잠시 숨을 돌릴 듯했습니다.
제1차 삼두정치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의 성공으로 로마 공화국의 영토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본국 이탈리아는 물론 스페인, 북아프리카, 그리스, 시리아 등 광대한 지역을 차지한 로마의 팽창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라고 불리던 지역으로 원정을 떠나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서부, 베네룩스 3국, 그리고 영국까지 로마의 지배 아래 편입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를 중심으로 한 삼두정치(제1차 삼두정치)와, 키케로나 소 카토 같은 원로원파 지도자들 간의 주도권 다툼이 격화되고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무력 충돌이 아닌 정치적 각축이었지만, 크라수스가 죽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삼두정치는 붕괴했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진영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최후 통첩을 받아 국가의 적(공적으로)으로 선포됩니다.
이제 검을 던질 때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원로원과의 결전을 결심했고, 결정적 전투는 그리스의 파르살루스에서 벌어졌습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뒤집고 승리의 여신의 축복을 받은 것은 카이사르였습니다.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망명했지만 이집트인들의 손에 암살당했고, 소 카토는 자결했습니다. 결국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공화정의 위기를 느꼈는지, 혹은 단순한 자기 보신이었는지, 카이사르는 암살됩니다. 범인 중에는 과거 카이사르가 목숨을 구해 주었던 브루투스도 있었다는 사실은 이 비극을 더욱 처량하게 만듭니다.
제2차 삼두정치와 악티움 해전
카이사르는 생전에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후계자는 누구일까요? 카이사르와 함께 싸운 안토니우스인가, 아니면 레피두스인가?
어느 쪽 이름도 아닌, 겨우 18세의 청년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는 처음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점차 세 사람은 손을 잡고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함께 몰아붙였습니다.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한 뒤 로마를 장악하자, 이번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로마의 동방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에게 하사하는 폭거를 저질렀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신속히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선포함으로써, 단순한 카이사르 후계자 다툼이 아닌 ‘로마 대 이집트’의 전쟁이라는 구도를 만들어 안토니우스를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양측은 그리스 연안의 악티움 해상에서 결정적 해전을 벌였고, 승리의 여신은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서았습니다.
이집트로 도피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모두 자살했고, 로마의 패권은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기원전 30년, 이로써 로마 공화국은 무너졌고, 시대는 새로운 영웅을 맞이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새로운 원수정(프린키파투스) 체제 아래 로마 제국을 창설했습니다.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