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사 교과서라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삼두정(Triumvirate)입니다. 초등 과정에서든 중등 과정에서든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만큼, 오늘은 삼두정의 탄생 배경부터 몰락까지 차근차근 정리해 보겠습니다.
삼두정은 라틴어 '트리움비라투스(Triumviratus)'에서 유래한 단어로, 말 그대로 '세 사람의 지배'를 뜻합니다. 당시 로마의 최고 기관이었던 원로원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삼두정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 원로원의 변천
로마 공화정은 근대 의회 민주주의의 모태로 평가받으며, 실제로 현대 영어에서 상원을 가리키는 '세넷(Senate)'이라는 단어도 로마의 원로원에서 왔습니다.
다만 원로원의 성격은 로마의 약 1000년 역사 동안 크게 달라졌습니다. 왕정 시기에는 결정권 없이 국왕에게 자문을 주는 자문 기관에 불과했지만,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원로원은 최고 의사결정 기관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실질적인 행정은 두 명의 집정관(콘술)이 맡았습니다. 임기는 1년이었고 재선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권력 집중을 막았습니다. 절실히 필요할 때는 임기 만료 후 속집정관(프로콘술)으로서 군사 활동을 계속하기도 했는데, 속주가 늘어나자 속집정관은 속주 총독의 역할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공화정의 구조적 한계와 독재관
그러나 이 체계에도 약점은 있었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 민주주의·공화정의 한계를 체감했습니다. 급격한 대응이 필요한 상황에서 오히려 경직성이 드러난다는 점이 그것인데, 이는 오늘날에도 개혁이 더디게 진행되는 여러 나라에서 확인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로마에는 비상시에 독재관(딕타토르)을 선출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임기는 6개월로 제한되었지만, 호민관조차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압도적 권력이 주어졌습니다.
제1차 삼두정: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해 지중해의 패자로 군림한 뒤, 원로원에는 부패의 물결이 밀려들었습니다. 고리대금업자와 대토지 소유주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빈부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졌습니다.
여기에 메스를 댄 것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였지만, 그들의 개혁은 기득권화된 원로원에 의해 완전히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의지를 계승한 인물이 나타났으니, 바로 로마 최대의 영웅으로 불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그라쿠스 형제와 달리 명문 귀족 출신이었던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내부에서부터 개혁하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가 실패했던 농지법을 다시 통과시키려 해도, 기득권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이익만 지키려는 원로원 의원들 때문에 법안은 좀처럼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폼페이우스에게 자신의 딸 율리아를 시집보내 정략적으로 묶었고, 채권자였던 크라수스 또한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비밀결사였던 제1차 삼두정
삼두정이라면 화려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처음에는 강한 비밀결사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60년에 결성된 뒤에도 그 존재가 공개되기까지는 무려 반년이 걸렸습니다.
애초에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은 겉으로나마 사이가 나쁜 사이였습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아내와 스캔들을 일으켰고, 폼페이우스는 그 이유로 아내와 이혼하기까지 했습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관계는 더욱 험악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를 돈밖에 없는 인간으로 깎아내렸고, 크라수스는 늘 폼페이우스의 재능과 인기를 질투했습니다.
무엇보다 카이사르는 평민파(포풀라레스) 출신이었던 반면 나머지 두 사람은 원로원파에 속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서로 어울릴 이유가 없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늦었습니다. 수많은 유력자들이 삼두정 편에 서 있었고, 세 사람은 집정관, 법무관(프라에토르) 같은 요직에 앉힐 인물을 미리 정해두는 킹메이커 역할을 하며 정치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토 분할과 삼두정의 붕괴
결국 카이사르는 북방의 갈리아 지역을,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스페인)를, 크라수스는 시리아 방면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결속을 강화한 삼두정과 원로원파 간의 정치 공방이 계속되었고, 서로의 파벌에서 집정관과 법무관을 배출하는 마치 근대 정당政治의 원형 같은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가 요절하고, 삼두정의 일원인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에서 전사하면서 균열이 시작됩니다. 원로원파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폼페이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자기 진영으로 포섭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되자 구도는 '삼두정 대 원로원'에서 '카이사르 대 원로원 + 폼페이우스'로 바뀌었습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카이사르가 군대를 해산하지 않은 채 루비콘 강을 건너자 드디어 내전이 시작됩니다.
폼페이우스는 근거지인 로마를 버리고 자신의 지반인 그리스에서 카이사르를 맞이했습니다. 초전에서 승리한 원로원파 의원들은 지구전을 주장하던 폼페이우스를 밀어내고 카이사르를 상대로 결전을 강행했지만, 결과는 카이사르의 완승이었습니다.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망명했으나 그곳에서 암살당하고 말았으며, 다른 원로원 의원들도 카이사르에게 복속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마저 암살되면서 기원전 60년에 결성된 제1차 삼두정은 완전히 막을 내립니다.
제2차 삼두정: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카이사르는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활약하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개선의 기분으로 유언장을 낭독했지만, 후계자로 지목된 사람은 이름 없던 18세 청년 옥타비아누스였습니다.
안토니우스는 물론, 카이사르 휘하에 있던 레피두스 역시 처음에는 옥타비아누스를 제거하기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타도하자'라고 외치자, 상황은 반전되어 세 사람이 동맹을 맺게 됩니다. 레피두스든 안토니우스든 뚜렷한 정치 신념이 없었다는 점을, 카이사르는 생전에 잘 알아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필리피 전투: 암살자들과의 결전
제2차 삼두정의 적은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비롯한 카이사르 암살자들이었습니다. 카시우스 일당은 시리아로 도피하여 동방에서 중세를 부과하며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연합하여 이에 맞섰습니다. 그리스 필리피의 땅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를 격파했고, 군사적 재능이 없던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에게 패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삼두정 측의 승리로 결판이 났습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를 각각 통치하게 됩니다. 결국 삼두정 내부의 권력 다툼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대결로 수렴했고, 이는 악티움 해전에서 완전히 정리됩니다.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초석을 다진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됩니다.
삼두정이 남긴 교훈
권력자 여럿이 나란히 서 있는 형태는 역사 속에 꽤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결국 누군가 세력을 독식하며 독재로 흘러갔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국가 단위로 생각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얄타 회담은 영국·미국·소련 3개국의 동맹으로 볼 수 있지만, 결국 냉전이라는 대립 구도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제1차 삼두정에 참여했던 세 사람 중 누구도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국가는 결국 독재나 과두정이 아니면 운용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가 지적했듯이, 민주주의는 머지않아 독재에 삼켜지는 운명을 지닐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삼두정의 실패는 우리가 반복해서 배워야 할 역사적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