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로마 최대의 스캔들! 사산조 제국의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세계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발레리아누스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군인 황제 시대의 여러 황제들 중에서도 특별히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단연코 사산조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힌 유일한 로마 황제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발레리아누스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명문 귀족의 혈통

발레리아누스의 본명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로,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크라수스와 같은 리키니우스 씨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군인 황제 시대에는 주로 군대의 옹립을 받은 인물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발레리아누스는 원로원 귀족 출신이라는 점에서 드문 유형이었습니다.

황제로 즉위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63세였고, 아들 갈리에누스(당시 37세)에게도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내려 공동 통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불운한 사연 때문에 무능하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로마군 전체의 지휘관 체계를 재편하고 가문을 불문하고 유능한 인재를 적극적으로 기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발탁한 인물 중에는 훗날 황제가 되는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도 있었으니, 적재적소의 인재 등용이라 할 만합니다. 다만 우수한 인재일수록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고, 이것이 훗날 로마가 삼분되는 혼란의 씨앗이 되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카라칼라 황제처럼 노골적인 무능함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추진한 정책이 역효과를 낳은 측면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참고로 이 시대 이후 로마 황제를 비롯한 요직에 다뉴브 강 유역 출신이 늘어나는데, 이는 당시 군제 개혁의 영향입니다.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북아프리카 출신 인물이 두각을 나타냈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로마 최대의 스캔들! 사산조 제국의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발레리아누스는 군사적으로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황제로 추대될 당시에도 경쟁자였던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아이밀리아누스를 누르고 장군들의 지지를 받는 형태로 즉위했습니다. 물론 경쟁 상대들이 스스로 민심을 잃은 탓도 컸지만요.

한편 발레리아누스는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을 단행하여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 평판이 극도로 나쁩니다. 탄압의 명분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국가 제사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사산조 제국과의 전쟁이 우선시되면서 탄압은 결국 반쯤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사산조 제국의 포로가 된 로마 황제

아마도 발레리아누스의 이름은 어느 나라의 세계사 교과서에도 등장할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페르시아 왕조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대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최대의 스캔들! 사산조 제국의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위 그림은 사산조 제국의 샤푸르 1세와 발레리아누스를 묘사한 것으로, 페르시아 측에는 위대한 승리였고 로마 측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굴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60년, 발레리아누스는 에데사(오늘날 터키 샨르우르파) 근방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샤푸르 1세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습니다.

역사를 이토록 상세하게 기록해 온 로마인들조차 발레리아누스의 몰락에 대해서는 자세히 서술하지 않습니다. 로마인들이 이 굴욕적인 사건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히자 아들 갈리에누스는 곧바로 단독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로마 측에서는 이미 아버지를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여긴 듯합니다.

이후 발레리아누스를 구출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고, 그의 최후에 대해 전해지는 확실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마치 이런 일이 없었던 듯 침묵을 선택했지만, 기독교인들은 환호했습니다. 기독교 변증가 락탄티우스는 저서 『박해자들의 죽음에 관하여』에서 "샤푸르가 말에 올라탈 때마다 발레리아누스를 네발로 기게 하여 등자 삼아 밟고 올랐으며,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에서 조롱과 비웃음 속에 노예처럼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고 적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분명 과장된 허구입니다.

페르시아 측 기록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는 포로 생활 중 사망했고, 사후 시신의 가죽이 벗겨져 방부 처리된 채 신전에 전시되었다는 전설까지 전해집니다. 전(前)황제가 노예처럼 살다가 죽었다거나, 죽은 뒤에도 굴욕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진실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포로로 잡힌 황제는 더 이상 외교적 협상 카드로서의 가치를 잃었고, 그의 최후는 영원히 미궁 속에 남았습니다.

포로 황제가 남긴 거대한 혼란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제국에 포로로 잡힌 뒤, 로마는 본래 겪고 있던 혼란을 한층 가속화했습니다.

아들 갈리에누스는 광대한 제국의 혼란을 수습할 역량이 부족했고, 각지에서 자칭 황제들이 난립하며 이른바 '30인의 황제 시대'라 불리는 암흑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결국 로마는 세 갈래로 분열되어 혼란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발레리아누스 개인이 무능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황제의 포행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어떤 무능한 황제보다도 큰 사회적 동요를 초래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탄압에 대한 신의 징벌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하늘만이 알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