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최초의 군인 황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트라키아 출신 거인 황제의 영광과 몰락

막시미누스 트라쿠스(Maximinus Thrax)는 3세기 위기 시대에 잠시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입니다.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이지만, 일반적으로 '트라키아의 막시미누스'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발굴한 천재

로마 공화정은 평민에게도 개방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소수 엘리트가 지배하는 과두정에 가까웠고 고위 관직의 상당 부분은 명문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군인 황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출신 배경과 무관하게 누구나 황제가 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막시미누스는 트라키아 속주 출신으로, 서기 173년경 이름 없는 목동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최초의 군인 황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트라키아 출신 거인 황제의 영광과 몰락

어린 시절부터 말과 함께 자란 탓에 승마에 능숙했던 그는 군대 입대를 희망했지만, 당시 로마 시민권이 없었기 때문에 정규군이 아닌 보조병 부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은 입대 시기에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모이시아 속주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0살도 채 되지 않은 막시미누스는 황제 앞에 자신을 알릴 기회를 얻었습니다. 부대 내 무술 대회에서 16연승을 차지한 그는 다음 날 황제 셉티미우스를 알현할 기회를 받게 됩니다.

황제는 이 건장한 청년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그가 말에 올라타자 "나를 따라올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며 말을 몰았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달리다가 점차 전력 질주를 시켰지만, 트라키아 출신의 이 청년은 끝까지 따라갔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로마의 말이 오늘날의 경주마만큼 빠르지 않았다 해도, 이는 놀라운 일화입니다.

말을 멈춘 뒤 황제가 "이 상태로 싸울 수 있겠느냐"고 묻자, 막시미누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곱 명을 제압했다고 하니, 도무지 범상한 인간이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 태어났다면 올림픽 금메달을 여러 개 훌쩍 따낼 재능의 소유자였을 것입니다.

황제 셉티미우스는 그를 친위대원으로 임명했습니다. 어쩌면 막시미누스가 곁을 지킨 덕분에 셉티미우스는 부하의 암살을 피하고 천수를 누릴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역할을 삼국지에 비유하면 허저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전장에서도 강했던 점을 감안하면 여포와 같고, 어쩌면 여포보다 더 강했을지도 모릅니다.

셉티미우스 황제 사후에는 그의 아들 카라칼라 황제를 섬겼던 것으로 보이며, 특별한 승진은 없었지만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카라칼라 황제가 암살되자, 그는 고향 트라키아로 돌아가 후계 황제 마크리누스를 섬기지 않고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경영이 순조로워 보였지만, 마크리누스 황제 사후 세베루스 가문의 엘라가발루스가 다시 황제가 되자 농장을 팔아 다시 황제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엘라가발루스를 싫어했던 듯, 가능한 한 서로 만나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그가 섬긴 것은 황제라는 직위가 아니라 셉티미우스 황제에게 받은 은혜였던 셈입니다. 용맹하고 인기 많은 장수였음에도 널리 알려지지 못한 점은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엘라가발루스가 암살된 뒤에는 후계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섬겼습니다. 알렉산데르 황제와는 궁합이 잘 맞았던 모양입니다. 막시미누스는 신병 훈련 담당관으로 임명되어 신병들을 상당히 엄격하게, 때로는 다정하게 훈련시켰습니다. 이미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신병들과의 레슬링에서 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황제 막시미누스 1세

최초의 군인 황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트라키아 출신 거인 황제의 영광과 몰락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될 당시의 구체적인 정황은 불분명합니다. 확실한 것은 군단 병사들이 막시미누스를 추대하여 다음 황제로 옹립했다는 사실입니다. 막시미누스가 알렉산데르 암살에 연루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부터 로마의 역사는 군인 황제 시대에 접어듭니다.

군부의 힘을 두려워한 원로원은 막시미누스의 즉위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야만 비로소 정식 황제가 되는데, 이 구도는 현대 일본의 총리와 국회의 관계와 유사하게 이어졌습니다.

명문 출신도 아니고 적법한 계승자도 아니었던 막시미누스는 전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으려 했습니다.

황제가 되자마자 막시미누스는 게르만족과의 전투에 나섰습니다. 격전 끝에 적을 크게 격파하며 순조로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이 트라키아 출신 남자가 황제가 되는 것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원로원은 말하자면 어린 시절부터 교양 교육을 받아 온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그들 눈에 이 트라키아 출신은 반쯤 야만인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속주 총독 고르디아누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막시미누스를 배제한 '진짜 황제'로 자신을 선언했습니다.

선언만으로는 명분에 불과했지만, 문제는 원로원이 고르디아누스의 황제 즉위를 승인했다는 점입니다. 셉티미우스 황제 시대부터 표면화되었던 원로원과 군부의 대립이 마침내 폭발한 것입니다.

막시미누스와 고르디아누스 간의 전쟁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고르디아누스는 뜻밖에도 인접한 누미디아 총독부의 친(親)막시미누스 군대에게 패배하여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급해진 것은 원로원이었고, 막시미누스에 맞서기 위해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 두 사람을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근위대에게 암살당했고, 막시미누스 역시 부하들의 손에 암살되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부하에게 배신당했다는 점에서 여포와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막시미누스가 사망한 서기 238년은 무려 다섯 명의 황제가 몰려 사망한 '다섯 황제의 해'였으며, 로마가 군인 황제 시대의 암흑으로 걸어 들어간 해이기도 합니다.

막시미누스는 군단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병사들의 월급을 두 배로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부하들의 마음을 사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원로원이 막시미누스를 미워한 것은 그의 출신보다는 보고서의 조잡한 문체 때문이었다고 하며, 그는 기독교를 혹독하게 탄압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생애를 돌아보면, 중국에서 여포와 항우가 천하를 얻지 못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나라가 다스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