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황제 시대는 로마 제국 쇠퇴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되지만,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 폭군이나 암군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폭군과 암군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국가에 여유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국가에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암군이 등장하면 그 나라는 순식간에 멸망하고 마련입니다.
대기업은 경영진이 무능해도 당장은 무너지지 않지만, 중소기업은 경영진 하나 잘못되면 급격히 기울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만 군인 황제 시대의 모든 황제가 유능했던 것은 아닙니다. 역량이 부족한 황제들이 줄줄이 이어진 것도 이 시대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바로 그 혼란의 시대에서 가장 유능한 황제로 꼽히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아우렐리아누스(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는 부모에 대한 기록도, 정확한 출생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의 베오그라드 인근, 다뉴브 강 유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고 어머니는 태양신의 여사제였다고 전해집니다. 농민 출신에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경우는 유럽 역사에서도 매우 드문 일입니다.
이후 어떤 경력을 거쳤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발레리아누스 황제 시절에 이미 요직에 임명되었고 큰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유능한 아우렐리아누스에게 각 기지의 순찰과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개선 사항을 맡겼다"고 말한 것이 그 신뢰의 깊이를 잘 보여줍니다.
부하들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인정 많은 지도자였습니다. 약탈을 절대 금지했고, "로마 시민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몸소 강조하는 등 규율 있는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러한 평판 덕분에,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가 병으로 사망하자 아우렐리아누스는 부하 장병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선출되었습니다.
게르만족을 격퇴하다!
즉위하자마자 아우렐리아누스는 북방의 게르만족 반달족을 격파하며 활약을 시작했습니다. 이어 고트족도 흩어졌는데, 그는 다키아 지역을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키아를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다키아 지역은 지형상 돌출된 형태를 하고 있어 방어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엇보다 아우렐리아누스 즉위 당시 로마는 서방의 갈리아 제국과 동방의 팔미라 제국이 독립하면서 세 갈래로 분열된 상태였고, 사산조 페르시아까지 로마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게르만족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팔미라 제국을 타도하다!
팔미라 제국의 기원은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힌 직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능이 마비된 동방 군단을 대신해, 팔미라 출신의 셉티미우스 오데나투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에 맞서는 동방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데나투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 제노비아가 스스로 여왕으로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적국이었던 사산조 페르시아와 손잡고 제멋대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즉시 동방으로 군대를 파견했고, 제노비아와의 결정적 전투를 벌였습니다.
용병 중심의 제노비아 군대는 로마 정예부대 앞에서 번번이 패배했고, 사산조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세 차례의 패전 끝에 제노비아는 포로로 로마로 끌려갔습니다.

갈리아 제국을 타도하다
갈리아 제국은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포로로 잡힌 후 게르마니아 총독 포스투무스가 세운 나라였습니다. 포스투무스는 내전 중 사망했고, 이후 테트리쿠스 1세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테트리쿠스 1세를 만나기 위해 갈리아로 진군했고, 갈리아 제국은 비교적 일찍 로마에 항복하게 됩니다.
이로써 분열된 로마를 재통일한 아우렐리아누스는 이제 동방의 오랜 숙적,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황제의 암살
군인 황제 시대에는 적군에게 살해당한 황제는 단 한 명뿐이었지만, 같은 편에게 살해당한 황제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황제를 암살할 수 있는 세력은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군단, 근위대, 원로원, 병사들까지 다양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를 암살한 것은 그의 비서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서관은 황제가 자신들을 숙청하려 한다고 병사들을 선동했고, 결국 황제는 자신의 부하의 손에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원로원은 관련자들을 모두 처형했고, 로마는 5개월간 황제가 공석인 시기를 겪게 됩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평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재위는 불과 5년 남짓으로 짧았습니다.
그러나 짧은 재위 동안 그는 게르만족 문제를 해결하고, 분열된 로마의 재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어냈습니다.
또한 로마 성벽을 개축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입니다. 내정 면에서도 커다란 업적을 남긴 셈입니다.

안타깝게도 비명에 그친 그의 삶이 조금 더 길었다면, 로마 역사상 최고의 군주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군인 황제 시대 최고의 황제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로마 중흥의 시조'라고 불러도 좋을 인물입니다.
실제로 원로원은 그에게 "세계의 회복자(Restitutor Orbis)"라는 칭호를 헌상했고, 당대의 역사가들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제국은 행복했으며, 병사들에게 사랑받고, 적들에게 두려움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