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게으른 왕'으로 불린 잉글랜드의 찰스 2세, 왕정 복고의 시대

삼왕국 전쟁(잉글랜드 내전)이 끝난 뒤, 잉글랜드에서는 왕정이 다시 부활했습니다.

복위된 인물은 찰스 1세의 아들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여동생 앙리에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찰스였습니다. 그는 즉위하며 '찰스 2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왕정 복고와 브레다 선언

 게으른 왕 으로 불린 잉글랜드의 찰스 2세, 왕정 복고의 시대

1660년,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찰스 2세는 귀국과 동시에 '브레다 선언(Declaration of Breda)'을 발표했습니다. 그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에 대한 대사(宥赦)
  • 종교의 자유 보장
  • 혁명 기간 중 소유권이 이전된 토지의 현 소유주 승인
  • 군대에 체불된 급여 지급

잉글랜드 임시 의회는 왕·하원·상원으로 이루어진 삼권 구조를 청교도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렸고, 본격적인 '왕정 복고(Restoration)'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찰스 2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통 방식의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청교도 혁명 당시 분실되었던 왕관 등의 보물들을 화려하게 새로 제작했습니다.

이후 그는 총선을 실시해 의회를 재구성하고 성공회(국교회)를 재건했으며, 가톨릭 신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는 한편 군대를 대폭 축소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 축소된 것이 육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육군이 약화되는 대신 해군은 더욱 강력해졌고, 이는 훗날 트라팔가르 해전 대승의 밑거름이 됩니다.

찰스 2세는 매년 의회로부터 120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지원금을 받는 조건으로 전통적인 봉건 세금과 승인되지 않은 과세를 폐지했으며, 의회를 거의 매년 소집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찰스 2세는 정치의 대부분을 각료와 의회에 맡기고 자신이 직접 나서는 일이 적었습니다. 이는 '다스리되 통치하지는 않는다(reigns but does not rule)'는 잉글랜드의 전통을 강화한 것으로, 그와 의회의 관계는 매우 원만하게 유지되었습니다.

결혼과 영토 확장

왕의 결혼은 언제나 국가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찰스 1세 시절의 청교도 혁명 역시 프랑스 가톨릭 국왕의 딸과의 결혼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찰스 2세는 포르투갈 국왕의 딸 캐서린과 결혼했습니다.

캐서린은 결혼 지참금으로 인도의 봄베이(오늘날의 뭄바이)와 북아프리카의 탕헤르를 가져왔고, 이 두 도시는 이후 영국령이 되었습니다. 이 두 거점은 훗날 대영제국 발전의 초석이 되었으며, 영국과 인도를 잇는 요충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찰스 2세와 캐서린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반면 찰스가 정부(情婦)들 사이에서 낳은 자녀는 10명을 넘었다는 사실은 훗날 잉글랜드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페스트 유행, 런던 대화재, 영란 전쟁

스튜어트 왕조 잉글랜드의 역사는 격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찰스 2세의 치세에도 수많은 시련이 닥쳤습니다.

1665년에는 페스트(흑사병)가 창궐했고, 1666년에는 런던 전체가 불바다로 변하는 '런던 대화재'가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1667년에는 네덜란드 함대가 템스강 유역까지 포격하는 굴욕적인 사건이 벌어지며 시대는 더욱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프랑스에서 루이 14세가 즉위한 때이기도 했습니다. 잉글랜드 의회는 스웨덴, 네덜란드와 함께 삼국 동맹을 결성해 프랑스에 맞섰지만, 찰스 2세 입장에서 루이 14세는 사촌이자 형제나 다름없는 존재였기에 왕과 의회 사이의 균열은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종교 문제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종교 문제는 언제나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중대한 쟁점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국왕이 행정적·정신적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는 나라로, 국왕이 수장인 프로테스탄트 성공회가 국가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1670년, 찰스 2세는 사촌 루이 14세와 비밀 회동을 가졌습니다. 그 핵심 안건은 바로 '잉글랜드 내 가톨릭 신앙의 자유'였습니다.

루이 14세로부터 막대한 비자금을 받아낸 찰스 2세는 '관용 선언(Declaration of Indulgence)'을 발표해 문자 그대로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의회는 이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의회를 통과하지 않은 법은 무효라는 원칙 아래, 잉글랜드의 중요 공직에 임명되려면 성공회 의례를 따라야 한다는 '심사법(Test Act)'을 제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커다란 문제가 터졌습니다.

국왕의 동생 제임스가 모든 공직에서 사임한 것입니다.

그는 영란 전쟁의 영웅이자 국왕의 친동생이었지만, 동시에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더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찰스 2세와 왕비 캐서린 사이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은 바로 이 제임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최고 수장이 된다는 일.

이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배제 위기와 토리당·휘그당의 탄생

의회는 왕위 계승 문제로 술렁였습니다. 오늘날 일본에서도 황위 계승 문제로 논란이 일듯, 이 시기 잉글랜드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양당제의 전통은 잉글랜드는 물론 미국 정치에까지 뿌리내렸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이 왕위 계승 문제였습니다.

제임스의 왕위 계승을 인정한 세력이 '토리당(Tories)', 반대한 세력이 '휘그당(Whigs)'입니다.

찰스 2세는 당연히 토리당과 손을 잡았고, 왕위는 다음 세대인 제임스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참고로 두 당의 이름은 각각 '스코틀랜드 무리(Whig)'와 '아일랜드 도적(Tory)'이라는 비방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거대한 물결이 되어 잉글랜드를 넘어 전 세계를 휩쓰는 대사건으로 번질 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찰스 2세의 죽음

 게으른 왕 으로 불린 잉글랜드의 찰스 2세, 왕정 복고의 시대

1685년, 찰스 2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중대한 고해를 남깁니다.

"사실 나는 가톨릭 신자였다."

프로테스탄트로 태어난 찰스 2세는 어린 시절 나라에서 쫓겨나 어머니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생활하던 동안 실제로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것입니다.

찰스 2세에 대한 평가

아버지와 달리, 그는 신중하고 현명한 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찰스 2세는 물론 최고의 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의회를 크게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정치를 잘 운영해냈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 역시 그 특유의 균형 감각 덕분일 것입니다.

찰스 2세는 일반적으로 '게으른 왕'의 시대로 평가받지만, 절대 왕정을 내세우지 않고 의회 정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다스리되, 통치하지 않는다.

영재들이 많은 잉글랜드 같은 나라의 왕에게는, 게으름이야말로 딱 좋은 미덕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