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나라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정답은 바로 대영제국입니다. 우리는 대영제국의 공용어였던 영어를 의무교육 과정에서 배웠고, 영국식 의회 제도 또한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세 이전 영국의 역사는 교육 과정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1066년 노르만 정복부터 본격적인 영국사가 시작된 것처럼 소개되는데, 이번 글에서는 그보다 앞선 시대를 살린 인물, 바로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앵글로색슨 7왕국 시대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은 게르만족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그들의 세력은 결국 전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21세기 현재까지도 게르만계 민족이 세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5세기 전반, 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 섬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고 군단을 철수시켰습니다.
그때까지 브리튼 섬에는 많은 켈트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로마군이 물러난 후 켈트인과 게르만족 사이의 충돌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엑스칼리버와 아발론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아서 왕 전설 역시 켈트인과 게르만족의 전쟁을 그린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그 결과는 게르만족의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패배한 켈트인들은 서쪽으로 밀려났고, 앵글로색슨어로 '이방인'을 뜻하는 말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웨일스(Wales)'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잉글랜드(England)라는 이름 자체가 '앵글족의 땅'을 의미합니다. 즉, 영국은 태생적으로 복잡한 민족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게르만족 역시 하나로 뭉쳐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를 몰아낸 게르만 부족들끼리는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 잉글랜드 땅에는 일곱 개의 왕국이 난립하며 오랫동안 일본의 전국시대 같은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른바 '앵글로색슨 칠왕국(Heptarchy)' 시대입니다.
일곱 왕국 중 먼저 두각을 드러낸 것은 메르시아의 오파(Offa) 왕입니다. 그는 에식스와 서식스 왕국을 무찌르고 본격적인 법전을 편찬했으며, 페니 은화를 주조하는 등 재정 운영에도 능숙했습니다. 나아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Charlemagne)와 대등한 관계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파가 죽자 메르시아 왕국은 급격히 세력을 잃었고, 그 틈새로 웨식스 왕국의 알프레드가 부상하게 됩니다.
데인족의 대침입
잉글랜드의 역사는 스칸디나비아의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극동에 일본이 있다면 영국은 극서에 위치한 나라로, 어떤 면에서 여러 민족 이동의 종착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르만족은 켈트인을 몰아냈지만, 이번에는 북방 데인족(Dane)의 침입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름 그대로 데인족은 덴마크를 세운 민족으로, 흔히 '바이킹'으로 잘 알려진 집단입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는 동시에 육상에서도 신속하고 기동성이 뛰어나 상당히 강력한 존재였습니다.
알프레드 대왕이 등장하기 얼마 전, 즉 카롤루스 대제 사후 데인족은 프랑크 왕국의 수도 파리를 공격해 막대한 금품을 뜯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맛을 본 그들은 이번에는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여러 왕국에 대한 대규모 침공에 나섰습니다.
앵글로색슨 측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동앵글리아 왕국과 노섬브리아 왕국은 순식간에 제압당했고, 웨식스 왕국 역시 절반이 점령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 알프레드가 웨식스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데인족이 침공했을 당시 웨식스의 왕은 에셀레드(Æthelred)였고, 알프레드는 그와 함께 데인족에 맞서 애슈다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에셀레드 국왕이 사망하면서 알프레드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즉위 직후부터 극심한 위기에 몰렸지만, 알프레드는 우선 공물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벌며 데인족을 일단 밀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875년 데인족이 다시 쳐들어오면서 격렬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양측은 공방을 거듭했고, 877년경에는 스워니지 앞바다에서 데인 함선 120척이 좌초·침몰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반대로 요충지인 칩펜햄을 빼앗기는 등 승부가 쉽게 갈리지 않았습니다.
결정적 순간은 에딩턴 전투였습니다. 알프레드는 이 전투에서 데인족에게 대승을 거두었고, 데인족 왕 구스룸(Guthrum)이 세례를 받아 알프레드의 의형제가 되는 내용의 웨드모어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렇게 데인족을 물리치고 승리한 알프레드는 '대왕(the Great)'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입니다.
법전 편찬과 잉글랜드 통일을 향하여

데인족을 물리친 후 알프레드는 선대 오파 왕이 남긴 법전을 참고해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고 반포했습니다. 이는 웨식스 국왕의 재량으로 법률을 확정하는 선례가 되었고, 이후 왕권 강화로 이어졌다고 평가됩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7개 왕국에서 4개 왕국으로 줄어든 상태였고, 웨식스 외의 왕국들은 데인족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재건하기 위해 알프레드는 제후와 귀족들에게 토지를 분여하고 '토지 증서(차터)'를 발급했으며, 이 문서들은 웨식스 왕실이 보관했습니다. 그 결과 웨식스 왕국의 잉글랜드 내 권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웨식스 왕권 강화와 병행하여 알프레드 대왕은 문화 진흥을 추진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영어뿐 아니라 로마 제국에서 사용되던 라틴어에도 능통했고, 직접 번역·집필한 저술들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 시대에 많은 문학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그는 또한 궁정 학교를 설립해 귀족子弟와 각지의 왕자들이 학문을 익히도록 했습니다. 이와 함께 귀족 제도가 재정비되었고, 전통적인 앵글로색슨의 '얼더먼(ealdorman)' 체계와 별개로 전국에 산재한 왕령지에 대리관을 파견하며 주(shire) 단위 행정을 정비함으로써 잉글랜드 '국가 체계'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899년, 전장과 내정에서 헤아릴 수 없는 업적을 이루어낸 대왕은 긴 잠에 빠져듭니다.
잉글랜드는 그의 생전에 통일되지 않았지만, 그의 손자인 애설스탄(Æthelstan) 대에 이르러 일곱 앵글로색슨 왕국이 비로소 통일되었습니다.
이 애설스탄이 최초로 '잉글랜드 국왕(King of England)'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인물입니다.
알프레드 대왕에 대한 평가
알프레드 대왕이 없었다면 잉글랜드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단순한 나비효과가 아니라, 그가 없었다면 데인족이 브리튼 섬을 지배했을 것이고, 역사는 너무나 크게 변하여 미국이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앵글로색슨의 언어인 영어는 세계의 언어로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가 영어를 배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영어가, 이 사람이 없었다면 배울 필요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농담은 이쯤 하고, 데인족을 격퇴하고 잉글랜드의 왕권을 강화한 알프레드의 업적은 훗날 잉글랜드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대영제국의 역사는 카이사르의 상륙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남겼지만, 진정한 의미의 잉글랜드사는 알프레드 대왕의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서양 역사상 손꼽히는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