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잉글랜드 최초의 왕 애설스탄, 일본에서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영국의 정식 국명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라는 무척 긴 이름입니다. 영국은 미국을 USA라고 부르듯 'UK'라는 약칭으로 널리 불리고 있으며, 정식 국명이 사용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영국 축구 대표팀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영국은 여러 나라가 모여 이룬 연합 국가입니다. 일본인에게는 다소 낯선 개념이지만, 인체가 무수한 세포로 이루어진 하나의 몸인 것에 비유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 영국은 네 지역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중 하나인 잉글랜드만 봐도 통일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잉글랜드가 처음 통일된 것은 937년입니다. 중국이 처음 통일된 것이 기원전 221년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늦은 편입니다.

이는 진시황(秦始皇)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잉글랜드를 처음 통일하고 '잉글랜드 왕' 칭호를 사용한 인물은 애설스탄(Æthelstan)이었습니다.

아마 일본인의 95%는 그가 누군지 모를 것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잉글랜드 왕(King of England)' 칭호를 사용한 인물을 살펴보겠습니다.

알프레드 대왕의 손자

잉글랜드 최초의 왕 애설스탄, 일본에서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로마가 철수한 뒤 잉글랜드 땅은 게르만족 계열의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하게 되었고, 이들은 일곱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이킹 덴마크인들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이들 왕국은 유린당했고, 앵글로색슨 왕국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이 위기를 만회한 인물이 웨식스 왕국의 알프레드 대왕입니다. 그는 덴마크인들을 격퇴하며 웨식스 왕권을 강화했고, '토지 증서'를 발급하는 권리를 손에 넣었습니다. 이는 곧 각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를 임명할 수 있는 권력이 되었습니다.

그 권리는 장남 에드워드에게, 그리고 다시 손자 애설스탄에게로 전해졌습니다.

애설스탄은 계속해서 저항하던 덴마크 세력을 몰아내고 잉글랜드 북부의 도시 요크를 점령했습니다. 바로 이 무렵부터 그는 '잉글랜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스코틀랜드 왕을 비롯한 북방 세력이 남하하면서 두 군대는 브루넌버러 전투(Battle of Brunanburh)에서 충돌했지만, 애설스탄은 화려하게 승리하며 그레이트브리튼 섬에서의 우위를 완전히 확립했습니다.

애설스탄은 각 지역을 다스리는 백작과 왕국들이 파견한 인사들을 통해, 할아버지 알프레드의 체제를 바탕으로 '국가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국가 아래에 주(shire)를 두고, 그 아래에 10인 조(tithing)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행정 단위를 점차 통합해 나간 것입니다.

또한 은화 페니(penny) 주조를 시작해 이를 잉글랜드의 통일 화폐로 삼았습니다. 진시황이 반량(半兩)을 중국의 통일 화폐로 정해 교역을 크게 활성화시켰듯이, 잉글랜드에서도 마침내 통일 화폐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애설스탄의 외교 정책

애설스탄은 외교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초대 황제 오토 대제와 프랑크의 위그 대공(훗날 카페 왕조를 개창한 위그 카페의 아버지)에게 누이동생을 시집보내는 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 오늘날 영국·프랑스·독일에 해당하는 세 나라 사이에 동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들 국가 사이에 동맹이 맺어진 것은 이후 다시 없는 일이었습니다. 좀 더 나아가 말하자면, 지금까지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영국뿐입니다.

위튼(Witan)과 기독교

애설스탄의 업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훗날 영국 의회의 기초가 된 '위튼(Witan)' 회의를 설치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자들의 회의 자체는 이미 알프레드 대왕 시대부터 존재했고, 거슬러 올라가면 7세기경부터 그 흔적이 보이지만, 이를 하나의 제도로 확립하고 자주 개최한 것은 애설스탄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잉글랜드 각지의 귀족인 이알도르먼(Ealdorman)과 캔터베리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대성당 사제들, 그리고 세인(Thane)이라 불리는 귀족들을 소집하여 입법을 중심으로 외교, 사법 등 다양한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현행 의회 제도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회의에는 왕족뿐 아니라 많은 기독교 성직자가 참여했으며, 크리스마스(그리스도의 탄생), 부활절(그리스도의 부활), 성령강림절(성령 강림)에 맞춰 연 세 차례 개최된 점도 큰 특징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교황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애설스탄 본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이 된 조카 에드거는 즉위 시 캔터베리 대주교를 초청해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이 대관식을 중시하는 견해에서는 에드거를 최초의 잉글랜드 왕으로 보기도 합니다.

* 애설스탄과 에드거 사이에는 세 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애설스탄은 평생 독신으로 자녀가 없었기에 왕위는 동생 에드문드 1세에게 계승되었고, 에드거는 에드문드의 아들입니다.

애설스탄에 대한 개인적 평가

그는 매우 훌륭한 군주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군사, 내정, 외교 분야에서 잉글랜드를 강국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자,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을 성공적으로 결합해 국가를 발전시킨 인물이며, 의회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반드시 다뤄져야 할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이 일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일본에서 조금 더 평가받아도 좋을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업적만 놓고 보면 사자심왕 리처드 1세보다 훨씬 위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