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아돌프 히틀러는 훌륭한 화가였을까?

화가의 꿈을 품던 소년

《나의 투쟁》에 담긴 히틀러 자신의 회고를 믿는다면, 아돌프 히틀러는 12세 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어린 날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무한한 사랑 속에서 자란 그는 언젠가 유명한 화가가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1905년 그는 학교를 떠나 꿈을 좇기 시작했고, 2년 뒤 빈으로 향해 현지 미술 아카데미 입학 시험에 응시했다. 자신의 드로잉 작품집을 들고 간 그는, 훗날 회고했듯 "시험을 쉽게 통과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명성을 향한 꿈

히틀러의 작품이 흔히 조롱거리가 되곤 하지만, 그는 분명 솜씨 있는 화가였다. 빈으로 떠나기 전부터도 스케치북을 거의 손에서 놓지 않았고, 마음에 드는 건물의 세부 묘사나 훗날 집필하고자 했던 오페라의 무대 장면들을 끊임없이 그려 넣었다. 소년 시절 친구였던 아우구스트 쿠비체크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오랫동안 린츠 '건강 산책로'에 놓인 벤치를 일종의 서재처럼 여겼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그곳에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수채화를 그렸다."

빈으로 이주한 히틀러는 아카데미 지원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학교 미술 시간에서 "단연코 최고의 학생"이었고, 이후에도 "평균 이상의 발전"을 이뤘다고 믿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훌륭한 화가였을까?

히틀러는 사람을 거의 그리지 않았는데, 이것이 미술 아카데미 입학에 실패한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같은 인물 묘사보다는 건축적 디테일을 포착하는 쪽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뼈아픈 실망이었다. 시험 응시 자격은 얻었지만, 심사위원들은 그의 드로잉을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평가 사유에는 제출된 작품들에 "인물(머리)이 너무 적다"는 문구가 짧고 담담하게 적혀 있었다.

꺾이지 않는 집념

실망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1년 뒤 다시 아카데미에 지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험 응시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 거절은 그의 평생을 괴롭히는 상처로 남았다.

이후 몇 년간, 미술 아카데미 지망생이었던 그는 화가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빈에서, 그다음엔 뮌헨에서 그림과 엽서를 팔았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말로 약 700~800점의 작품을 그렸고, 점당 약 5마르크를 벌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화풍은 과장 없이 단순하고 사실적이었으며, 대부분 건물, 꽃, 풍경이 소재였다.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그린다"고 그는 한번 말한 바 있다. 디테일, 특히 건축 디테일에 매료되어 있었지만, 작품에 등장시키는 인물은 극소수에 그쳤다. 이는 앞선 낙방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훌륭한 화가였을까?

1914년 전쟁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수채화 도구를 서부전선으로 가져갔고, 그곳에서 주변 풍경을 그리고 스케치했다. 이 시기 작품 중 하나로 1914년 12월, 이프르 남쪽 메신의 수도원이 포격으로 파괴된 모습을 담은 수채화가 있다. 훗날 독재자가 된 그가 여전히 화가의 꿈을 꾸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취미를 이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첫 휴가를 베를린에서 보내며 현지 미술관들을 둘러보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예술적 감성을 지닌 독재자

미술 아카데미에 다시 들어가는 일을 여전히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정치가 곧 그의 삶을 장악했다. 이후 그의 예술 활동은 몇 장의 낙서와 소품 드로잉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베를린 재건을 염두에 두었던 '게르마니아 계획'과 관련된 건축 스케치들이다.

더 나아가 총통의 취향은 제3제국 문화 전반의 성격을 규정했다. 그는 괴벨스가 애호하던 모더니즘 미술을 거부했고, 나치 독일의 공식 미술 스타일은 이상적인 아리아 가족을 담백하고 감상적으로 표현하는 지루한 고전주의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훌륭한 화가였을까?

훗날 독재자가 가장 능숙하게 그린 것은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같은 건축물이었다.

독재자는 신고전주의 조각가 아르노 브레커 같은 전통파 예술가들의 후원자였다. 반면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성공을 누렸던 바우하우스 관련 디자이너들과 같은 전위적인 예술가들은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히틀러 본인의 작품들은 숨겨졌고, 충성스러운 상인들이 나라 곳곳으로 파견되어 찾아낼 수 있는 독재자의 그림과 드로잉을 수거하는 임무를 맡았다. 공개된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1937년에는 공개 전시 자체가 금지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 작품들은 수집가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일부는 경매에서 10만 유로를 넘는 가격에 거래되었다. 총통의 수채화 물감함은 2010년 8,000유로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었다.

히틀러는 빈 아카데미 입학 실패가 오히려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그 기억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화가라는 직업에 대한 꿈은 그때 사라졌고, 주변 현실에 대한 좌절감은 커져만 갔다. 물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실패가 훗날 독일에 닥친 참화의 한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출처

이 글은 로저 무어하우스(Roger Moorhouse)의 저서 《100개의 사물로 보는 제3제국(The Third Reich in 100 Objects)》(즈나크 호리존트 출판사)에서 발췌·편집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