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문은 댄 존스(Dan Jones)의 『플랜태저넷』에서 발췌·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존 왕의 죽음, 그리고 9세 소년에게 남겨진 분열된 왕국
악명 높은 '무지왕(Lackland)' 존은 1216년 10월 19일 뉴어크온트렌트(Newark-on-Trent)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프랑스의 침공으로 유린당하는 분열된 왕국이었습니다. 죽은 왕에 맞선 고귀한 반란 귀족들이 소집하고 프랑스 왕태자 루이(훗날 루이 8세)가 이끄는 군대는 나라 곳곳을 자유롭게 누비고 있었고, 왕위를 물려받은 아홉 살 아이 헨리 3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헨리 앞에 놓인 통치는 복잡하고 불확신했지만,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재위는 무려 56년에 달했으며, 훗날 조지 3세와 빅토리아 여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영국 왕 중 가장 긴 재위로 꼽혔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좋든 싫든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아버지 '무지왕' 존과 아들 에드워드 1세 '롱생크스(장왕)' 사이에 끼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할지 아시나요?" — 윌리엄 마샬의 충성
왕의 죽음은 언제나 왕국 역사의 중요한 분수령입니다. 새 군주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미래를 열어줄지에 대한 불확실성은 내전 상황에 놓인 잉글랜드에서 더욱 커졌습니다. 반란의 상당 부분은 존 왕과 불만을 품은 귀족들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존이 죽자 많은 남작들은 아직 아홉 살배기인 새 주군에게 더 이상 대항하지 않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더욱이 어린 왕에게는 나라의 모든 귀족을 휘어잡는 거목의 보호막이 있었습니다. 바로 윌리엄 마샬(William Marshal)입니다. 다소 성인전(hagiography)에 가까운 필체로 쓰인 그의 전기는, 엄중한 순간에 마샬이 남긴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모두가 소년을 떠난다면 내가 무엇을 할지 아시나요? 빵 한 덩이를 얻어서라도 그 아이를 어깨에 업고, 섬에서 섬으로, 이 군대에서 저 군대로 함께 떠날 것입니다."
글로스터에서 서둘러 치른 대관식
헨리 3세의 대관식은 글로스터 수도원에서 거행되었습니다. 평소의 대관 장소인 웨스트민스터가 반군의 손에 넘어가 있었고, 왕조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그 엄숙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자리에서 헨리는 윌리엄 마샬, 선왕의 충신 휴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 윈체스터 주교 피터 데 로슈(Peter des Roches), 그리고 교황 특사 구알라 비키에리(Guala Bicchieri)에 둘러싸여 왕관을 받았습니다. 이는 존 왕이 승인한 대로 잉글랜드가 로마 교황의 봉신 왕국이며 교회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천하에 알리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링컨의 기병 돌격과 샌드위치 해전
마샬은 거의 70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갈리아 출신 왕자와 반란 남작들의 멍에에서 잉글랜드를 해방하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부었습니다. 1217년 5월 20일, 그는 직접 기병 돌격을 지휘해 링컨에서 프랑스군과 반군 연합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적은 혼란 속에 도주했고, 불만을 품은 남작들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 전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니콜라 드 라 헤이(Nicholaa de la Haye) 관련 글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휴버트 드 버그가 샌드위치 앞바다에서 또 한 번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프랑스 왕태자 루이의 아내 카스티야의 블랑카(Blanche of Castile)가 모아 칼레에서 출항시킨 80척 규모의 함대를 격파한 것입니다. 왕위 찬탈의 기회가 사라졌음을 깨달은 루이는 굴욕감을 안고 프랑스로 돌아갔고, 이후 킹스턴 조약에서 헨리를 잉글랜드의 정당한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어린 시절 스티븐 왕을 인질로 삼았던 일화부터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젊은 왕 헨리, 리처드 1세, 존 왕—을 차례로 섬겼던 윌리엄 마샬은, 1219년 세상을 떠나기 전 왕조의 초대 왕 헨리 2세의 손자의 왕좌를 지켜냄으로써 왕가에 바치는 마지막 은혜를 다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의 두 번째 대관식
임종을 앞둔 마샬은 헨리 3세에게 새 교황 특사 판둘프(Pandulph)의 보호를 받으라고 조언했습니다. 헨리는 이 권고를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여 판둘프를 최측근 고문 중 한 명으로 삼았지만, 동시에 피터 데 로슈와 휴버트 드 버그도 고위 자리에 두었습니다. 1220년 5월 17일, 헨리의 두 번째 대관식이 이번에는 모든 예법을 갖춰 웨스트민스터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젊은 왕은 드 버그를 수석 고문으로 선택했고, 데 로슈는 훗날 십자군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렇게 웨스트민스터에서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은 헨리 3세는 이제 국정 운영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미지 | 위키미디어 공용(Wikimedia Commons)
참고 자료 |
댄 존스, 『플랜태저넷: 잉글랜드를 만든 왕들』
피터 애크로이드, 『영국사 제1권: 재단』
로이 스트롱, 『영국 이야기』
사이먼 샤마, 『영국의 역사』
데릭 윌슨, 『플랜태저넷』
마크 모리스, 『존 왕: 배반, 폭정, 마그나카르타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