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히틀러는 어떻게 독일인이 되었는가?

그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를 독일인이라 여겼다. 그러나 법은 오랫동안 그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민으로 태어났고,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자신이 터전 삼은 독일에서 살았음에도 시민권을 얻기까지는 무려 수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는 독일 시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오늘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시민이 되었다." 1932년 2월 25일, 이 소식은 산불처럼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다음 날에는 《뉴욕타임스》까지 이 소식을 보도했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해 3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이것이 결정적인 변수였기 때문이다. 만약 NSDAP(나치당) 당수의 귀화가 늦어지거나 막혔다면, 그는 이번 선거는 물론 이후 어떤 공직 선거에도 출마할 수 없었다.

이 무렵 히틀러는 이미 거의 20년 가까이 독일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1913년 새 터전인 독일로 이주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늦도록 필요한 절차를 밟지 않았던 걸까?

국경 잘못 건넌 사람

1889년 훗날 '총통'이 될 인물이 태어난 작은 마을 브라우나우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곳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는 이미 수십 년간 오스트리아령이었기 때문에, 히틀러 가문의 아들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신민으로 등록되었다.

히틀러는 어떻게 독일인이 되었는가?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국경 도시 브라우나우의 이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법적 귀속은 실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작가이자 역사가인 밥 커러더스는 저서 『히틀러의 격동의 청년기』에서 이 지역 주민들이 꼭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유대감을 느낀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정치적 국경이 어디에 그어졌든 이 지역은 압도적으로 독일적인 곳이었고, 주민 대다수는 독일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더 큰 독일 제국의 일부로 여기려는 당연한 경향이 있었다.

젊은 아돌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일 민족주의 사상을 깊이 흡수하며 자랐고, 훗날 고향에 대해 "핏줄은 바이에른이지만 오스트리아 국가의 통치 아래 있는 곳"이라고 적었다.

그는 분명 스스로를 독일인이라 느꼈다. 다만 정당한 시민권이 없을 뿐이었다. "비스마르크 제국에 속할 행운을 모든 독일인이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은근한 질투와 함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것이 도무지 이해될 수 없었다"고 그는 훗날 『나의 투쟁』에서 회고했다. 이런 태도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했던 아버지와의 갈등으로까지 번졌다. 아버지는 빌헬름 2세의 통치 아래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하나로 합쳐지자는 아들의 주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프로이센군에서 복무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동질감을 드러냈음에도, 히틀러는 서둘러 '진짜' 조국으로 이주하지 않았다. 뮌헨으로 옮겨간 것은 1913년에야 이루어졌고, 그곳에서 몇 년 뒤 그의 정치 경력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훗날 그는 자신이 "정치적 이유"로 이주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징병을 피해 도망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밥 커러더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민이었고, 연령 기준으로 1913년에 군대에 징집될 예정이었다. 그의 친구 아우구스트 쿠비체크의 회고를 고려하면 징병 회피 의혹은 더욱 강해진다. 쿠비체크는 자신이 징집되었을 때 히틀러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일로 도망치는 것이라며 도피를 권유했다고 증언했다.

1년 뒤, 이 오스트리아 출신 이주민은 독일 황제에 대한 충성을 증명했다. 오스트리아 징병 심사위원회가 자신을 현역 부적합 판정한 데는 기꺼이 응하면서도, 정작 빌헬름 2세의 군대에는 자원 입대한 것이다. "나는 합스부르크의 명분을 위해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내 동포들이 진정으로 속해 있는 제국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그는 훗날 설명했다.

히틀러는 1914년 8월 초 독일군 입대를 청원했고, 바로 다음 날 가장 가까운 병영에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약 6년간 군복무를 했으며, 이것이면 자신의 '독일성'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긴 듯하다. 그의 지지자들은 이 논거를 자주 활용하며, 물론 아무런 법적 효력 없이, 그들의 지도자는 전쟁터에서 이미 귀화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어떻게 독일인이 되었는가?

1914년 프로이센군에 입대한 뒤 동료들과 함께한 히틀러.

무국적자

흥미롭게도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은 오스트리아 당국 관계자 중에도 있었다. 1924년에도 그들은 히틀러의 불충을 기억하고 있었다. 뮌헨 폭동 이후 바이에른 관료들은 성가신 이민자의 추방을 검토했다.

1924년 봄, 오스트리아는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가을, 안건이 다시 논의되었을 때 국경경비대는 그의 입국을 거부했다. 총통의 전기 작가 중 한 명인 이언 커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입국 거부] 지시는 연방총리 이그나츠 자이펠이 직접 하달한 것이었다. 바이에른 쪽이 법적 논거를 들어 오스트리아 정부에 히틀러의 귀환을 압박하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자이펠은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히틀러가 독일군에서 복무한 것이 오스트리아 국적 상실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법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논리였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히틀러는 어떻게 독일인이 되었는가?

프로이센군 시절 두 병사와 함께 찍힌 히틀러.

한편 히틀러는 같은 위협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조치했다. 1925년 4월, 그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공식 포기했다. 이 신청서에서도 그는 독일군 복무 경력을 근거로 들었고, 독일에서 귀화 신청을 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미래의 추방 위험을 제거하는 데 그가 치른 비용은 무려 7.50 오스트리아 실링이었다"고 커쇼는 논평한다.

그러나 발표했던 것과 달리, 훗날 제3제국의 지도자가 될 그는 정작 독일 시민권 신청을 하지 않았다. 이후 7년간 그는 무국적 상태로 남았다.

꼼수로 얻은 시민권

시간이 흐를수록 히틀러의 국적 문제는 점점 절박해졌다. 1920년대 후반부터 NSDAP 지도부의 측근들은 최소한의 형식으로 최대한 빨리 그에게 선거권을 부여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먼저 바이에른에서 이를 시도했으나 좌절되었다. 1930년에는 튀링겐에서 허위 경찰 하사관 임명을 통해 독일 시민권을 부여하려는 구상도 실패했다.

성공한 것은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벌인 작전이었다. 그곳에서 나치당 당수는 농업 및 측량국 참사관 직위를 받았고, 공무원 신분에는 자동으로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그는 1932년 2월 25일 시민권을 취득했고, 다음 날 새 조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

연방 정부는 이런 강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2월 26일자 《뉴욕타임스》 기자들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정치적 압력에 의한 나치 지도자의 귀화는 제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히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외국인의 정상 절차를 통한 시민권 취득을 거부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만을 표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그를 순교자로 만들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의식은 독일 정부의 묵인과 승인 아래 진행되었지만, 정부가 새 시민을 큰 환영으로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당사자 본인 역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축하에 대해 그는 "나 말고 독일인들에게 축하해야지!"라는 말로 일축했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정식 귀화에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단순히 자신이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는 수많은 다른 이들에게서 그 시민권을 빼앗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