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을 통해 사형에 처해진 최초의 여왕
그녀는 재판을 거쳐 처형된 최초의 여왕이었다. 수년간의 감옥 생활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그녀에게는 이런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스코틀랜드의 왕관은 그녀가 아직 기저귀를 차던 시절에 이미 머리에 얹혔고,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 프랑스의 통치자가 되었다. 대체 어떻게 해서 그녀는 단두대 앞에 서게 된 것일까?
메리는 제임스 5세 국왕과 그의 두 번째 아내인 기즈 가문의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로, 1542년 12월 8일 금요일 에든버러 근교의 릴리스고 궁전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로부터 스코틀랜드 왕위를 물려받았고, 1543년 9월 9일 갓난아기 신분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영국 역사학자 존 가이(John Guy)는 저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실화』(2025년 1월 개봉한 메리 스튜어트 영화의 원작이기도 하다)에서 이 의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아홉 달 된 아기는 기름 부음을 받은 여왕으로 변신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내릴 수 있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신성한 군주의 권능을 지닌 존재가 된 것이다."
메리 스튜어트는 재판을 통해 사형에 처해진 최초의 여왕이었다. 그녀에게 평탄하고 평온한 삶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요람 속에서부터 이미 많은 적을 두었고, 어린 시절은 왕위를 지키려는 어머니의 몸부림으로 점철되었다. 그녀는 곧바로 프랑스로 보내졌는데, 그곳의 왕세자 프랑수아와 혼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잉글랜드 왕위에 앉아 있는 헨리 8세 튜더를 결코 달갑게 하지 못했다. 그의 목표는 반항적인 스코틀랜드를 복속시키고,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유대를 끊는 것이었다.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까지 지닌 증손녀
잉글랜드 군주 입장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었던 사실은, 메리가 자신의 왕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근거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국 왕실 공식 웹사이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그녀의 권리 주장은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주장만큼이나 탄탄한 것이었다. 헨리 7세의 증손녀인 메리는 헨리 8세의 자녀들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관을 요구할 자격이 있었다." 훗날 젊은 여왕의 숙적이 되는 엘리자베스는 당시 잉글랜드 가톨릭 교도들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폐위된 앤 볼린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메리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과 프랑스 왕세자와의 혼약 덕분에 '프랑코-브리튼 제국'이라는 구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녀에게 커다란 기대가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프랑스 친척들의 모든 기대에 부응하는 듯 보였다. 할머니는 손녀에 대해 "나이에 걸맞은 아이로서 볼 만큼 예쁘고 잘생겼다. 머리카락은 적갈색이고 안색도 좋다. 피부가 부드럽고 희기 때문에 자라면 분명 미인이 될 것이다"라고 적었다.
동시에 여섯 살배기 스코틀랜드 여왕은 우아하고 자신감 넘쳤으며, 총명하고 재치 있고 충성심과 공감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개인적인 매력과 흥미로운 대화 능력 덕분에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과도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프랑스의 앙리 2세는 그녀를 무척 아꼈다. 그녀를 "내 딸"이라 불렀고, 물론 왕세자를 제외하긴 했지만 자신의 모든 자녀들보다 메리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그의 세심한 배려로 메리는 훗남 남편이 될 인물과 거의 동일한 과정으로 교육받았다.
웨딩드레스의 흰색, 과부 베일의 흰색
토너먼트에서의 불운한 사고로 앙리 2세가 세상을 떠나고 프랑수아가 프랑스의 새 국왕이 되었을 때, 메리는 열여섯 살이었다. 왕세자는 한 살 어렸지만 이미 독립적인 통치의 최소 연령을 넘겼으나, 그 역할을 위해 전혀 준비되지 않은 듯 보였다. 부모 어느 쪽에게도 정치적 재능을 물려받지 못했고, 병약하고 왜소했기에 백성들은 그를 르 프티 루아(le petit roi), 즉 "작은 왕"이라 불렀다.
1558년 4월 24일 거행된 결혼식 날, 메리는 신랑을 완전히 압도했다. 완벽한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을 돋보이게 하는 눈부신 흰색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것이다. 그 색이 프랑스 궁정의 전통적인 상복 색이라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날, 별처럼 빛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옆에 선 마른 체구의 프랑수아는 마치 양피 코트 위의 꽃처럼 아내와 어울리지 않았다. 불행히도 곧 밝혀진 사실이 있다. 비록 배우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메리가 결코 이길 수 없는 또 한 명의 강력한 여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장모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였다. 소녀는 프랑스 궁정에서 위치와 영향력을 두고 그녀와 필패의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유력하고 야심 찬 기즈 가문 친척들에게 집착하는 것을 싫어했고, 아들에 대한 아내의 감정에 질투심을 느꼈다. 게다가 메리는 카트린이 수년 전 자신이 프랑스 왕세자의 약혼녀이자 아내였던 시절에 결여됐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왕가 출신에 왕관을 지참금으로 가져왔고, 매력적이며 활기 넘쳤다.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반면 프랑수아의 어머니는 강력한 지위를 얻기 위해 수년간 고전해야 했다.
두 여인의 갈등은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수아가 2년 남짓의 통치 끝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열여덟 살의 미망인에게 프랑스에 머물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스코틀랜드로 향하는 배에 올랐을 때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프랑스여, 안녕. 이제 다 끝났어. 다시는 너의 해안을 볼 일이 없겠지."
연이은 스캔들
열여덟 살의 메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정치적·종교적 분쟁으로 불타고 있었다. 평생을 프랑스에서 보낸 가톨릭 신자였고, 여성이기까지 했기에 현지 귀족들이나 프로테스탄트 어느 누구도 그녀를 자신들의 여왕으로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들여온 이질적인 풍습은 보수적인 스코틀랜드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모는 음모를 낳았고, 군주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특히 1561년 사보이아 대사 모레타 백작의 일행으로 스코틀랜드에 온 젊은 피에몬테인 출신 다비드 리치오(David Rizzio)는 그녀의 백성들에게 가시처럼 걸림돌이 되었다. 류트 연주 실력으로 군주의 주목을 끌었던 그는 빠르게 메리의 총애를 얻었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남작들의 분노를 사면서 그녀의 비서관, 그리고 소문에 따르면 정부까지 되었다.
유력 관료에 대한 반감은 잉글랜드 궁정까지 전해졌다. 엘리자베스 튜더 역시 총신들과의 밀월로 유명했지만, 리치오와의 관계와 그의 높은 지위를 모두 비판했다. 그녀는 심지어 스코틀랜드 여왕이 "그를 사랑하고 후대하여, 그의 이익과 명예에 좋지 않을 만큼 큰 영향력을 그에게 주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역할을 과시하며 스스로 화를 자초한 리치오는 여왕 곁에 나타난 마지막 오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의 구설수 끝에 메리는 헨리 스튜어트, 즉 달른리 경과의 결혼을 결심했다. 처음에 달른리는 비서관과 친구였고, 함께 카드와 체스를 두곤 했다. 그러나 결국 아내의 불륜 소문을 믿게 되었고, 자신은 명목상의 왕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통치는 여왕과 그녀의 정부라고 알려진 자의 손에 넘어갔다고 확신했다. 결국 그는 성가신 비서관을 제거하고 여왕을 무력화하기 위한 음모에 가담했다.
공범이었는가, 아니었는가?
음모는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다비드 리치오의 전성기는 갑작스럽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끝났다. 원래는 1566년 3월 7일, 의회 개회 전날 실행될 예정이었으나 메리의 출행으로 이틀 연기되었다. 음모자들은 여왕이 현장에 있기를 원했다. 연인들을 현행범으로 붙잡는다는 명분으로 살인과 쿠데타 혐의를 피하려는 의도였다.
저녁 식사 무렵, 음모자들은(달른리와 함께) 메리가 머무르던 홀리루드 궁전에 뛰어들어 그녀 발밑에 웅크리고 있던 비서관을 학살했다. 임신 중이던 군주는 이중의 충격을 받았다. 총애하던 인물의 잔혹한 살해를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음모에 자신의 남편이 가담해 있었기 때문이다. 달른리는 자신의 역할을 뉘우치며 이튿날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전해진다.
여왕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3월 21일, 그녀는 남편의 모든 혐의를 취소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왕이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는 모두 반역죄로 처벌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남편은 깨끗한 손을 지니게 되었지만, 메리는 그를 더욱 냉대하기 시작했다.
석 달 후인 1566년 6월 19일 아침, 길고 힘든 진통 끝에 여왕은 아들을 낳았다. 같은 날 달른리가 아이를 인지함으로써 어린 제임스의 왕위 계승권을 흔들 수 있는 어떠한 소문도 차단되었다. 메리는 모인 궁정인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주여, 하나님은 저와 주님께 아들을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 외의 다른 이로부터 잉태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헨리는 얼굴을 붉히며 아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훗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이 될 아이였다.
왕실의 포로
그러나 아버지는 후계자의 탄생을 오래 기뻐하지 못했다. 1567년 2월 9일에서 10일로 넘어가는 밤에 그는 살해당했고, 메리는 황급히 보스웰 백작과 재혼했다. 이는 또 다른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여왕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유폐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사촌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메리는 거의 2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녀는 아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썼지만, 아들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정부와 결혼하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믿음까지 주입받으며 자랐다.
여러 해가 흐른 뒤, 불행하고 왕관 없이 폐위된 여왕은 엘리자베스에 대한 음모에 휘말리게 되었고, 이것이 그녀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운명에 너무나 순응해 있어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존 가이는 저서에서 그녀가 가톨릭 신앙의 순교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나의 구원자이자 창조주, 그리고 가톨릭 교회를 위해 내 피를 흘리며 죽을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으며 매우 기쁩니다."
메리는 1587년 2월 8일 참수형에 처해졌다. 사형 영장에 서명한 엘리자베스는 그녀보다 16년을 더 살았다. 임종 자리에서 그는 숙적의 아들 제임스를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여부는 어떻든, 1603년 7월 25일 제임스는 잉글랜드의 왕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서로 다투던 두 나라를 동군연합으로 묶었고, 이 연합은 한 세기 이상 후 실질적인 합병으로 발전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은 어머니의 시신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있는 선조 헨리 7세의 납골당으로 옮겨 안장했다. 그리고 오늘날 재위 중인 영국의 군주는 바로 메리 스튜어트의 직계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