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이 그리스를 향해 내놓은 수사는 올해, 소아시아 참극(Asia Minor Catastrophe) 100주기를 맞으며 한층 거세졌다. 그는 "그 극적인 시기에 집단학살을 자행한 것은 터키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 내에서도 일부는 되묻는다. "우리 민족은 잔혹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는가?" 따라서 몇 가지 사실을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글: 콘스탄티노스 콜레바스(Konstantinos Colevas)
출처: 파라폴리틱스(PARAPOLITICS)
오스만 제국 기독교인 학살의 시작
오스만 제국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1894년 술탄 압둘하미트 2세(Abdul Hamit II)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박해로 시작되었으며, 1914~1922년에는 청년 터키당(통일진보위원회) 정권과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정부 시기에 걸쳐 지속되었다. 독립적인 학자들은 물론 진중한 터키 역사학자들조차 하나같이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말살은 위로부터 조직적으로 계획된 것이었으며, 군대와 헌병, 지역 지휘관들, 깡패 무리, 심지어 일반 터키 시민들의 참여 속에 실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계획된 학살과 개별 사건, 결정적 차이
반면 그리스 병사나 민간인이 터키 민간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경우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계획도 없었고 위로부터 내려온 명령도 없었다. 개별 그리스인들이 용납될 수 없고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를 저질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당국이 체포한 가해 그리스인들을 엄중히 처벌했다는 점이다.
그리스군은 1919년 5월 파리 강화회의로부터 5년간의 위임 기간을 받고 스미르나(Smyrna)에 상륙했다. 5년 뒤에는 스미르나 주(Vilayet of Smyrna)의 미래를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스 행정부는 투표권을 가질 현지 무슬림 주민들에게 온정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할 명분이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그리스군이 스미르나에 상륙한 며칠 뒤, 두 명의 그리스 병사가 군사법원의 판결에 따라 처형되었다. 어쩌면 지나치게 엄격했을 수 있는 본보기성 조치였지만, 그리스 당국이 현지 무슬림에 대한 폭력 행위를 결단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한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학자들이 문서로 입증한 진실
이스라엘의 작가이자 연구자인 베니 모리스(Benny Morris)와 드로르 제에비(Dror Ze'evi) 박사는 최근 저술한 방대한 문서 연구서 『30년의 학살: 터키 기독교 소수민족의 몰살(1894~1924)』에서 당시 서구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남긴 문서와 증언을 바탕으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터키 지도부는 자국을 순수하게 터키인의, 무슬림의 나라로 남기기 위해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의 말살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집단학살은 곧 국가 정책이었다. 반면 폭력을 저지른 그리스인의 경우는 개별 사건으로 기록되며, 실제로 위로부터 받은 명령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였다. 두 저자는 1920년 4월, 스미르나 총독 겸 사령관 아리스티디스 스테르기아디스(Aristides Stergiadis)의 명령에 따라 무슬림 민간인 살해를 저지른 세 명의 그리스인 '산적 두목'이 공개 교수형에 처해졌음을 문서로 기록하고 있다.
두 이스라엘 저자는 당시 문서에 대한 철저한 고증 끝에, 터키 측이 제기한 그리스인의 소위 '범죄'에 관한 상당수 항의가 허위이며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음을 확인한다. 아울러 1894~1924년 기간 기독교인이 무슬림을 공격한 드문 사례에서조차 단 한 명의 정교회 성직자도 가담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반대로 터키 측에는 종교 광신주의가 만연했고, 그 결과 수많은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이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당해야 했다.
역사는 에르도안의 주장이 아니라 문서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