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시작된 이름, 처음 만든 곳은 카르타고
'성대(聖隊)'라는 이름은 흔히 그리스를 연상시킨다. 한때 무적으로 통하던 스파르타를 무찌른 테베의 정예 성대, 그리고 훗날 그리스 독립운동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이끈 부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신성 부대', 즉 '신성 동맹'이라는 개념 자체는 다른 나라들에도 존재했고, 그 최초의 주인은 바로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의 성대는 기원전 4세기에 창설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스파르타를 격파하며 고대 세계 전역에 위명을 떨치던 테베 성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카르타고의 '신성 부대'는 오로지 시민으로만 구성되었으며, 그중에서도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의 자제들만이 선발되었다. 부대에 배속된 시민들은 장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는데, 덕분에 그들의 무구는 늘 최고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위, 조직, 무장
성대의 병사들은 비상하게 높은 사기와 소속 부대에 대한 강한 긍지감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들은 자신을 저명한 정예 부대의 일원, 즉 엘리트 전사로 여겼다. 집안의 아들이 '신성 부대'에 들어가는 것은 그 가문에 커다란 영광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입대가 예상되는 가문의 자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단련되었고, 성년이 되면 곧바로 전장에 설 준비를 갖추었다. 다만 이들이 어린 시절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최종 선발 기준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부대의 규모는 시기에 따라 2,000~3,000명 사이에서 변동했다. 디오도로스는 성대의 병력을 2,500명으로 기록했다. 병사들은 철이나 황동으로 만든 근육형 금속 흉갑을 착용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금속판이나 비늘조각으로 보강한 아마포 흉갑과 정강이 보호대를 갖추었다.
투구는 필로스식부터 프리기아식까지 다양한 종류를 사용했다. 무기는 보통 길이 1.8m 안팎의 그리스식 창과 검이었고, 방패는 중앙에 여러 문양을 새긴 흰색 방패를 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방패가 원조인 그리스 방패보다 더 깊게 오목하게 파여 있고, 지름도 약 1m로 약간 더 컸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디테일은 부대 군기를 든 병사들이 사자 문양을 새긴 투구를 썼다는 것이다.
최후의 예비대
성대는 그리스의 기준에 충실한 호플리테스 팔랑크스 대형으로 싸웠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짧은 창 때문에 그리스 호플리테스와 정면으로 맞섰을 때는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이론상 성대는 카르타고 본토인 아프리카 지역에서만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시칠리아 원정에도 참여했다.
'신성 부대'의 병사는 그 출신과 훈련, 무장 덕분에 스스로를 정예 전사로 여길 만큼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고, 실제로도 카르타고군의 핵심 중추를 이루었다. 그들은 마치 나폴레옹의 노인근위대처럼 전투에서 최후의 예비대 역할을 맡아,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에야 비로소 전열에 합류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그리스와의 결전
크리미소스 강 전투(기원전 341년)에서 카르타고 성대는 카르타고군 진영의 중앙을 담당하며, 하스드루발과 하밀카르 장군 휘하 대군의 최후 예비대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카르타고군은 시라쿠사의 티몰레온에게 완패했고, 성대는 문자 그대로 궤멸당했다. 사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2,500~3,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30년 후 성대는 재건되어 기원전 311년 다시 시칠리아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오히려 아프리카 본토에서 시라쿠사의 참주 아가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군과 마주쳤다. 결과는 또다시 패배였다. 숙련된 그리스 전사들을 상대로 성대는 번번이 고배를 마신 것이다.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 성대원 2,000명이 모두 전사했다고 기록했으며, 다른 사료들은 부대가 병력의 절반을 잃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