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레니즘 시대의 두 강대국인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오늘날 시리아와 레바논에 해당하는 이른바 '코엘레시리아(속 시리아)'를 놓고 수십 년간 치열하게 충돌했습니다. '시리아 전쟁'으로 알려진 이 여섯 차례의 분쟁은 기원전 274년에 시작되어 기원전 168년까지 이어졌으며, 양국의 국력을 갉아먹고 결국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제4차 시리아 전쟁의 발발
기원전 219년, 제4차 시리아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당시 셀레우코스 왕좌에는 이른바 '메가스(대왕)'라 불리는 안티오코스 3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좌에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가 앉아 있었습니다.
기원전 217년, 두 왕은 결정적 충돌을 준비하기 위해 대군을 시리아에 집결시켰습니다. 셀레우코스군은 가자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오늘날 라파 인근의 라피아에 진을 쳤고, 프톨레마이오스군은 불과 1km 거리에서 적진과 마주 보았습니다.
예상대로 양측은 거의 매일 소규모 교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던 중 안티오코스에게 고용된 전직 프톨레마이오스 용병인 아이톨리아 출신 테오도토스가 프톨레마이오스를 암살하려고 적진에 잠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양측 병력 비교
안티오코스는 위풍당당한 대군을 소집했습니다. 그 핵심은 테오도토스 휘하의 정예 아르기라스피데스(은방패병) 사리사 창병 1만 명이었습니다. 여기에 니카르코스와 헤르미올로스 테오도토스가 이끄는 그리스 사리사 창병 2만 명, 동방 출신 경보병 2만 2,500명(리디아, 메디아, 아랍, 킬리키아, 다이, 페르시아인), 정예 궁수·투석병과 아리아 창병 2,000명, 트라키아 펠타스트 2,000명, 크레타 및 신크레타 궁수 2,500명(크레타 이주민 후손), 그리스 용병 5,000명(아마도 방패를 장비한 정예 펠타스트로 추정), 기병 6,000명, 그리고 인도 전투코끼리 102마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측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마그네시아 출신 에우릴로코스 휘하의 정예 사리사 창병(아게마) 3,000명, 보이오티아 출신 소크라테스가 지휘하는 펠타스트 2,000명, 그리스 사리사 창병 2만 5,000명, 그리스 용병 8,000명, 크레타 및 신크레타 병력 3,000명, 리비아 경보병 3,000명, 이집트 사리사 창병 2만 명, 트라키아 용병 6,000명과 갈리아인 50명, 그리고 인도 코끼리보다 작은 아프리카 코끼리 73마리를 보유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보병, 특히 전차병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기병과 코끼리에서는 열세였습니다.
평원 위의 격돌
5일간의 소규모 접전 끝에 두 대군이 마침내 전투 태세를 갖추고 마주 섰습니다. 양군 모두 산개병들의 팔랑크스를 대형 중앙에 배치하고, 그 좌우를 경부대가 감싸며 최외곽에 기병을 배치했습니다. 코끼리들은 경보병 부대의 엄호를 받으며 진형 전방에 배치되었습니다.
전투는 양군 코끼리들의 충돌로 시작되었고, 수적으로도 체구적으로도 앞선 안티오코스의 인도 코끼리들이 승기를 잡았습니다. 공포에 질린 아프리카 코끼리들이 아군 경보병 진영 속으로 내달려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동시에 안티오코스는 우익 기병 선두에 서서 적을 압박하며 돌진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즉시 사리사 창병 선두에 나서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중앙을 공격했습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군 우익 기병도 상대 기병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같은 시각 안티오코스는 맞은편 프톨레마이오스군 익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안티오코스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중앙에서는 더 강력한 프톨레마이오스 팔랑크스가 승리했고, 프톨레마이오스군 우익 기병은 적 팔랑크스의 측면으로 돌진했습니다. 안티오코스는 궤멸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그의 병사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습니다.
전투의 결과와 의의
셀레우코스군의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보병 약 1만 명과 기병 300명이 전사했고, 추가로 4,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코끼리 5마리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반면 프톨레마이오스군은 보병 1,500명, 기병 700명, 코끼리 16마리를 잃는 데 그쳤습니다.
이 승리 덕분에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200년까지 코엘레시리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파니움 전투에서 승리한 안티오코스가 상황을 뒤집으면서, 코엘레시리아는 최종적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