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계획의 탄생
1947년 그리스 내전이 한창이던 시절, 그리스 공산당(KKE) 지도자 니코스 자코야디스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기상천외한 작전이 있었다. 바로 '호수(Limnes)' 계획이다. 이 계획은 1947년 9월 11일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제3차 전원회의에 상정되었고, 당시 분위기답게 "민주적으로" 가결되었다. 회의 장소가 프레스파 호숫가 인근이었기에 계획 이름에도 '호수'가 붙었다.
6~7개월 만에 병력 3배, 비현실적 목표
계획의 골자는 그리스 민주군(DSE) 병력을 1947년 9월의 24,000명에서 1948년 봄까지, 단 6~7개월 만에 60,000명으로 세 배로 늘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DSE는 존속 기간 내내 강제 징집을 동원해서도 겨우 수천 명을 모집하는 데 그쳤으므로, 이 목표는 처음부터 유토피아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병력 증강과 더불어 DSE는 60,000명 전원에게 완전한 무장과 장비를 갖춰야 했다. 정작 기존 부대조차 중화기를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상황에서였다. 공병 자재와 통신 장비, 운송 수단의 확보도 계획에 포함되었고, DSE를 정규군으로 전환하겠다는 방침도 세워졌다.
궁극적인 목표는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 북부 광역 지역의 '해방', 그리고 여기에 병행하여 '민주정부'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계획이 담은 세 가지 핵심 목표
계획서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첫 번째 기본 목표: 마케도니아, 에피루스, 테살리아 간 영토적 통합의 회복. 이를 통해 남쪽으로 실질적인 물자와 병력을 보내 테살리아, 로우멜리, 펠로폰네소스 지역에서 DSE 전력을 전개하고 대규모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적군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결과적으로 중부·서부 마케도니아 지역의 압박을 덜어낸다는 구상이었다.
두 번째 주요 목표: 하시아–피에리아–올림포스–키사보스 산맥 간 영토적 통합의 회복. 코자니 고원부터 악시오스 강 일대까지 DSE의 안정적 지배를 확립하고, 에데사–아르니사 및 카스타니아 관통로를 중심 축으로 삼아 서부 마케도니아를 남쪽과 동쪽에서 차단한다. 동시에 서·동부 마케도니아 쪽에서 중부 마케도니아를 강화한다.
세 번째 주요 목표: 코니차–메초보, 그레베나–초틸리–네스토리오 일대에 자유지역을 조성하기 위한 결정적인 공세에 나선다.
지역별 작전 구상
계획에는 지역별 임무 배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에피루스: 파고니와 라카 술리 지역에 상설 거점을 설치하고, 아르타–프레베자–요아니나 간 축선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한다.
테살리아: 핀도스 중앙 산맥(코지아카스–아그라파)에서 적을 몰아내고 그곳의 DSE 진지를 사수한다.
로우멜리: 라미아–카르페니시 도로에 대한 지배력을 통해 테살리아와 로우멜리 간 영토 통합을 회복한다. 아테네–라미아 주요 간선도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적군의 최대 병력을 이 축선에 묶어둔다. 아테네 인근 파르니타산으로의 진출, 에비아 섬에서의 작전 전개, 펠로폰네소스와의 직접 접촉 회복을 통해 해당 지역으로의 물자 이동을 실현한다.
동부 마케도니아–트라키아: DSE 병력을 10,000명까지 증강하고, 동부 마케도니아의 병력을 요새화하여 지르노보 고원에 대한 우리 측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배치한다. 하이두 산맥 지구에 실질적 병력을 영구적·안정적으로 주둔시켜 트라키아를 분리한다.
터무니없는 군사적 요구들
계획은 이보다 더 비현실적인 것들까지 상정하고 있었다. 대공포의 확보와 배치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어려운 해안포와 전투기, 심지어 기뢰를 부설할 경량 선박까지 요구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물론 위 목표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다. 1947년 12월 23일 '임시 민주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그 수도는 한 마을에 불과했고, '민주진영 국가들'로부터 끝내 승인받지 못했다. 다음 날 DSE는 코니차를 공격했으나 결국 패배했고, 하나의 도시마저 수도로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타키스 라자리디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대규모 예비병력 창설, 대도시 점령, 광역 지역 해방 같은 실현 불가능하고 결코 실행되지 않았던 웅대한 계획들(예컨대 '호수' 계획)은 파기되었다. 더 우스운 것은 자코야디스가 '호수' 계획을 마치 참모부의 검토 산물인 양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밝혀진 바로는 DSE의 군 지도자들은 그런 계획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다시 달군 '마케도니아' 카드
끊임없는 출혈로 기울어진 민주군의 대열을 슬라보마케도니아인이라도 끌어들여 두텁게 하려 필사적이었던 그들은 '마케도니아' 문제를 다시 불지피웠다. 결과 따위는 아랑곳없이, 1949년 1월 제5차 전원회의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DSE와 인민혁명의 승리로 인해, 마케도니아 인민은 오늘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피를 바치고 있는 바로 그 방식대로, 자신들이 원하는 완전한 민족적 복원을 이루게 되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규군'이라는 이름의 공허
같은 시기 DSE는 정규군으로 개편되었으나, 그 실상은 본격적인 포병도 없고 중화기도 드물며, 예비 병력도 없고, 편제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귀중한 간부가 부족하고, 구성 또한 시기에 따라 그리 그렇지 못하게 '그리스적'이지 않은 정규군이었다.
전쟁 내내 DSE 대열을 거친 남녀 전사는 약 100,000명으로, 대부분 젊은이, 심지어 10대 소년소녀이었다. 이들 중 압도적 다수는 강제 또는 비자발적 징집 출신이었다. 상대적으로 더 광신적이었던 이들은 DSE로부터 '민족적 복원'을 기대했던 슬라보마케도니아인들이었다. 슬라보마케도니아인은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DSE 전력의 20%를 차지했다. 트라키아 무슬림에 대한 모집 시도도 있었으나 종교적 이유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차미족 동원 시도, 그리고 좌절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DSE가 에데스(EDES)에 의해 그리스에서 추방된, 그리스인 학살의 가해자였던 알바니아 차미족(Tsamides)마저 모집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관련 첫 요청은 1947년 마르코스 바피아디스가 티라나에 한 것으로, 정황상 '호수' 계획이 예정한 전사들을 모으기 위한 시도였다.
이후 1948년의 추가 요청은 거부되었고, 1949년의 요청은 정부 차원에서는 받아들여졌지만 정작 그리스인에 대한 두려움을 쉽게 떨치지 못한 차미족 본인들은 응하지 않았다. 결국 DSE에 합류한 이는 약 150명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