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9월은 그리스 육군(ES)에게 결코 순탄한 달이 아니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서야 그라모스를 확보했지만, 비치(Vichy) 지역에서는 참사로 번질 뻔한 실패를 겪었다. 그리스 공산당(KKE) 소속 군대인 그리스 민주군(DSE)의 역습이 전선을 돌파했는데, 이는 그리스 육군 현지 지휘부의 무능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 사건 이후 그리스 육군은 팔차타–아기오스 키리아키–덴드로호리–보코비크 일대로 후퇴해 카스토리아 시를 방어했다. 이 도시는 전선에서 평균 불과 15km 거리에 있었다. 문제의 방어선은 알리아크몬 강이 거의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지형이었다.
전력과 작전 계획
알리아크몬 강 서쪽 구역에는 그리스 육군 제45보병여단과 제61보병여단(총 6개 대대)이, 동쪽 비코비크까지는 제3산악여단과 제73보병여단이 각각 배치되었다. 예비대는 말리 마드에서 해체된 뒤 재편성 중이던 2개 대대 규모의 제22보병사단이 맡았다.
반면 능선 너머에서는 DSE 지도부가 말리 마드에서 거둔 승리를 발판 삼아 '트루먼의 용병 군주파시스트들'에게 새로운 타격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목표는 이 지역에서 그리스 육군의 재편성을 저지하고, 나아가 카스토리아 시 자체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DSE 지도부가 세운 작전 계획은 상당히 무모한 것이었다. 주공은 팔차타–덴드로호리 지역에서 그리스 육군 제45·제61여단을 상대로 가해지고, 여타 병력도 동시에 투입되는 방식이었다.
정면 공격과 깊은 돌파를 결합해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그리스 육군 병력이 재편성 중이던 메소포타미아, 코로밀리아, 레프키 마을까지 진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만약 성공한다면 DSE와 카스토리아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방어 병력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는 잘 익은 과일처럼 그들의 손에 넘어가 '물자 조달'(약탈)과 강제 징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DSE 지도부는 말리 마드의 패배로 그리스 육군 병력의 사기가 바닥나 있어, 침투 부대에게 포위될 위기라고 인식하는 순간 싸움 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DSE는 제16, 제107, 제108여단을 팔차타–덴드로호리 구간에 투입하고 특히 덴드로호리 지역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한편 제14여단은 알리아크몬 강 동안을 담당하기로 했다.
야간 기습
1948년 9월 19일 새벽 02시경, 침투 임무를 맡은 DSE 부대가 행군을 개시했다. 이 부대들은 숲과 골짜기 같은 지형적 이점을 활용해 방어자들의 지원 거점 뒤편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05시, DSE의 다른 부대들이 정면 공격에 나섰다. 동시에 침투 부대도 공격을 개시해 그리스 육군의 포병 진지에 도달했다.
이윽고 극도로 격렬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수류탄, 총검, 칼, 몽둥이, 돌멩이까지 총동원되었다. 양측 모두 상대의 기습을 받은 형국이었다. 그러나 DSE는 어느 곳에서도 승세를 잡지 못했다. '사기가 완전히 무너졌다'며 자신들의 지도부가 떠들어댔던 '군주파시스트, 트루먼의 용병' 병사들은 오히려 완강함과 희생정신, 결의로 DSE 전사들에 맞섰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과감하고 결연한 역습으로 그리스 육군은 DSE 침투 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다. 고립된 이 부대들은 크시로포타모스 골짜기와 라파타 숲에서 점차 섬멸당했으며, 소탕 작전은 9월 21일까지 이어졌다.
이 작전의 결과는 DSE의 완전하고도 처참한 패배였다. 전장에서 528구의 반군 시신이 확인되었고, 135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47명이 부상 상태로 생포되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상자가 전장에서 철수된 점을 감안하면 DSE의 실제 손실은 1,000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사망자와 부상자를 전장에서 먼저 옮겨 적에게 피해 규모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DSE의 오랜 관행이었다.
DSE가 패배한 원인은 무엇보다 적을 과소평가한 데 있었다. DSE는 말리 마드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실력이나 전력 덕분이라기보다 그리스 육군 일부 장교들의 무능 덕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