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운명에 맞선 황제 헤라클리우스: 비잔티움 제국을 구원한 기적 같은 삶

"모든 것을 감행하려면 위험이 스스로 몰아쳐야 한다. 두려워할 것이 모든 것으로 가득할 때, 오히려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피에르 코르네유

시인 코르네유가 새겨 놓은 이 격언은, 운명마저 공격할 용기를 낸 비잔티움 황제 헤라클리우스(575~641)에게 더없이 잘 어울린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불가피한 운명이었다 해도, 하나의 기적 같은 위업이 제국이 역사 속으로 너무 일찍 가라앉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러나 7세기 초만 하더라도 동로마 제국은 완전히 붕괴되기까지 고작 한 걸음 차이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한다.

운명에 맞선 황제 헤라클리우스: 비잔티움 제국을 구원한 기적 같은 삶운명에 맞선 황제 헤라클리우스: 비잔티움 제국을 구원한 기적 같은 삶

600년경(1)과 650년경(2)의 비잔티움 제국

오늘날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황제지만, 그의 인생 여정은 놀라움 그 자체다. 총독의 아들로 태어나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무기를 손에 든 채 직접 전장에 나섰으며, 암살 시도를 모면하고, 거지로 변장하기도 했다. '성십자가'로 여겨지던 나무 조각을 직접 짊어지고 다녔고, 정복한 영토 전부를 눈앞에서 잃어버리는 아픔도 겪었다. 그의 삶이 문자 그대로 한 편의 로맨스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경건함이라는 이름으로 중세인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후 얀 데 베르에서 미겔 시메네스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19세기의 판화들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운명에 맞선 황제 헤라클리우스: 비잔티움 제국을 구원한 기적 같은 삶

(4) 얀 데 베르(Jan de Beer)의 그림

첫 번째 위업들

금발에 회색 눈동자를 지닌 젊은 헤라클리우스는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태어났다. 아르메니아 혈통인 그의 아버지는 로마 속주 아프리카의 총독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에 벌어진 혼란은 부자를 본국으로 돌아오게 만들었고, 결국 귀환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황제 포카스의 무능함이 동로마 제국에 치명타를 안기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연대기들은 이 남자에 대해 냉정했다. 그의 잘못은 단순히 과거의 실수를 반복한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한층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610년 10월, 헤라클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과감한 조치가 불가피했다. 그는 포카스를 용이하게 폐위시키고, 폐허가 된 국가의 황제로 즉위했다. 상황은 참담했다. 여러 전선에서 침략자들에게 점령당한 비잔티움은 내부 분열로 유린당하고 있었다. 슬라브족은 발칸반도를 침공했고, 페르시아는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지역을 점거했으며, 아바르족은 이제 조공을 요구하고 있었다.

외부의 위협을 넘어, 제국의 장부를 갉아먹는 거대한 악도 있었다. 행정은 무질서했고, 경제는 피를 잃었으며, 군대는 지치고 사기가 바닥난 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내부의 소요는 산발적인 사건에 머물지 않았다. 농민들은 침략자들의 끊임없는 약탈에 시달렸고, 정교회 내부에서는 종교적 갈등이 만연했다. 설상가상으로 황실의 권위는 강력한 귀족층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동로마 제국에는 침략자들을 축출할 힘이, 아니 어쩌면 살아남을 힘조차 없었다.

아나톨리아의 군사화를 착수한 인물이 바로 헤라클리우스였다. 그는 아나톨리아의 속주들을 군사 총독의 통치 아래 두고, 국경 수비군은 물론 내륙의 병사와 농민에게까지 세습적 군 복무를 조건으로 토지를 하사했다. 그 결과는 혁명적이었다. 깊이를 두고 유연하게 방어하는 체계가 발달했고, 자유롭고 무장한 농민 계층이 탄생한 것이다.

농업이 되살아나면서 국가는 군대 급여 부담의 상당 부분에서 해방되었다. 통제하기 어려운 용병들은 제국을 지킬 이해관계가 있는 병사들로 대체되었다.

운명에 맞선 황제 헤라클리우스: 비잔티움 제국을 구원한 기적 같은 삶

(5)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그림

연표로 보는 주요 사건들

614년, 페르시아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믿었던 성물도 함께 빼앗겼다. 이후 헤라클리우스는 아바르족을 달래기 위해 617년 혹은 619년 트라키아의 헤라클레아(현 튀르키예 마르마라에레글리시)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천둥같이 닥친 것은 함정이었다. 그들은 단지 황제를 사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헤라클리우스는 적의 추격을 받으며 무력으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배신의 배후를 알지 못한 채 그는 결국 그들과 화평을 맺었고, 페르시아를 상대로 공세에 나설 자유를 손에 넣었다.

622년, 참회자의 복장을 입고 성모의 신성한 성상을 들고 헤라클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도시의 수많은 성소에서는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도에 대한 승리와 십자가의 회수, 예루살렘 탈환을 비는 기도가 끓어올랐다. 이 경건한 행위는 훗날 이 황제의 명성, 특히 국경 밖에서의 명성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빼어난 원정 끝에 그는 페르시아군을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내고 페르시아 군주에게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호스로 2세(사산조 페르시아 황제)는 이 제안을 경멸하며 일축했다. 자신을 신들에게 사랑받는 세계의 주인이라 칭하며, 그리스도는 죽어가는 제국을 구원할 수 없다고 모욕을 퍼부은 것이다. 이 발언의 무게를 간파한 헤라클리우스는 호스로의 답장을 공개적으로 알렸다.

625년, 헤라클리우스는 아나톨리아로 물러났다. 사루스 강 서안에 진영을 치고 있을 때, 페르시아군이 건너편 강기슭에 나타났다. 그의 병사 다수가 격하게 다리를 건넜다가 매복에 걸려 섬멸당했다. 텐트에서 급히 뛰쳐나온 헤라클리우스는 다리를 건너며 승리를 확신하는 페르시아군을 목격했다. 제국의 운명이 저울질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검을 움켜쥐고 다리로 달려가 페르시아 지휘관을 베어 쓰러뜨렸다. 병사들이 그의 뒤로 대열을 정비하며 적을 격퇴했다.

626년, 페르시아군은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진격하여 아바르족과 합세해 콘스탄티노플의 토성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비잔티움은 페르시아 부대를 해협 건너로 수송해야 했던 아바르족의 조잡한 함대를 침몰시켰다. 유목 기마 민족인 아바르족의 무수한 공격은 또다시 격퇴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다시 페르시아로 침입했다. 627년 12월, 아르메니아 고원지대를 가로질러 티그리스 평원으로 진군한 그는 니네베 폐허 근처에서 페르시아군과 조우했다. 그는 애마에 올라 단신으로 세 명의 페르시아 장군을 베어 넘기고, 부대 선두에서 적진으로 돌격했다. 결국 마주한 적장을 처치하고 페르시아군을 와해시켰다.

한 달 후, 헤라클리우스는 대대적으로 다스타게르드(현 이라크)에 입성했다. 호스로 2세는 자신의 아들에게 폐위되었고, 헤라클리우스는 그 새 황제와 강화를 맺으며 성십자가와 포로, 그리고 상실한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다. 승전의 영광 속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그는 모세, 알렉산드로스, 스키피오 등으로 찬양받았다.

630년, 그는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 직접 성십자가를 봉안했다.

물론 이 몇 개의 연대표가 비잔티움 제국의 상황과 헤라클리우스의 '전설적 위업'을 통해 설명되는 사건들에 대한 심층적 독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운명에 맞선 황제 헤라클리우스: 비잔티움 제국을 구원한 기적 같은 삶

(6) 헤라클리우스의 반란을 묘사한 콘스탄틴 마나세스의 연대기

고난의 길

그러나 승리의 영광은 끝내 희미해졌다. 헤라클리우스는 단일한 신학적 신념인 '단의론(Monothelitism)'으로 교회를 화합시키려 애썼으나 실패했다. 634년, 제국 내 갈등과 오랜 불안에 지친 그는 더 이상 최전선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잔티움군은 636년 야르묵 전투에서 대패했고, 곧 시리아가, 이어서 이집트가 아랍인들에게 넘어갔다.

황제의 개인적 삶도 죽음을 앞두고 뒤흔들렸다. 첫 번째 아내 파비아 에우독키아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조카 마르티나와 결혼했다. 이로써 당대인들에게 근심을 안겼고, 헤라클리우스는 근친상간자라고 비난받았다. 병고에 시달린 그는 아마도 전립선 비대증과 배뇨 장애, 염증으로 고통받다가, 격렬한 경련 끝에 641년 2월 세상을 떠났다. 정확한 날짜는 미상으로 남아 있다.

종교적 열정과 개인적 무용 모두를 불러일으킨 군사 지도자 헤라클리우스는 병사들에 대한 배려를 늘 잊지 않았다. 신중하고 계산적인 전략가였던 그는 당대의 대부분의 지도자들보다 덜 비인간적인 전쟁을 치렀다. 그는 정복한 도시의 주민들을 노예로 삼거나 학살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포로들을 굶어 죽이는 대신 석방했다.

그의 경건함은 이런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623년, 승전을 거듭한 병사들이 그의 철수 계획에 반해 페르시아 더 깊숙이 진군하고자 했을 때, 그는 문제를 하느님께 맡겼다. 부대가 사흘간 금식하고 기도한 뒤, 그는 병사들 앞에서 성경을 우연인 듯 펼쳐 철수를 명하는 것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구절을 읽었다. 중세 세계가 이런 모습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비잔티움의 보석 같은 황제는 외세의 거듭된 공세를 버텨냈고, 아마도 비잔티움 제국을 구원하여 in fine, 즉 마침내 1453년까지 제국이 버틸 수 있게 해준 인물로 기억된다.

출처 및 참고문헌:

(1) 피에르 코르네유, 『헤라클리우스』 1막 5장
– 기사 삽화: 7세기 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를 묘사한 양면 메달.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를 모델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1400년경 프랑스 제작), 보스턴 미술관 소장
– 콘스탄틴 마나세스 연대기
– Ludovic Drapeyron,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7세기 비잔티움 제국』
– 라루스 사전
– 유니버셜리스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