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821년 마케도니아의 테르모필레: 끝까지 저항한 콘스탄티오스 마로네이아스 대주교

1821년 마케도니아의 테르모필레: 끝까지 저항한 콘스탄티오스 마로네이아스 대주교

마케도니아, 민족 투쟁의 최전선에 서다

태초부터 그리스의 땅이었던 마케도니아는 일부 세력이 정치적 목적으로 내세워 온 주장과 달리, 민족 해방 투쟁에서 결코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마케도니아는 1821년 봉기에도 이 땅이 배출한 훌륭한 인물들을 통해 함께했으며, 잔혹한 아시아 정복자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혁명의 선포와 두 지도자

마케도니아 혁명은 1821년 5월 17일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 혁명의 선구자는 에마누일 파파스(Emmanuil Papas)와 마로네이아의 콘스탄티오스 대주교(Metropolitan Constantios of Maroneia)였습니다. 특히 콘스탄티오스 대주교는 아토스산 에스피메노스 성 수도원에서 직접 축도를 집전하며 혁명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예리소스의 대승과 오스만 제국의 위협

할키디키 예리소스(Ierissos)에서 벌어진 튀르크와의 첫 번째 본격 교전은 그리스인들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그리스 혁명을 진압하기로 결심한 술탄 마흐무트 2세는 바이라 파샤에게 보병 2만 명과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남부 그리스로 진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오스만군은 마케도니아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이라는 실제로 대군을 이끌고 이동했지만, 예리소스에서 패한 살로니카의 유수프 베이(Yussuf Bey)가 마케도니아 혁명부터 진압해 달라고 호소하자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레디나 협곡, '마케도니아의 템페'에서의 결사 항전

한편 그리스인들은 대응책을 찾고 있었습니다. 에마누일 파파스는 부하들과 함께 폴리기로스(Polygyros)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오스 대주교는 케르딜리아(Kerdylia)와 홀로몬타스(Holomontas) 산 사이, '마케도니아의 템페'로 불리는 레디나(Redina) 협곡에서 바이라의 진로를 차단하기로 결심합니다.

거의 평생을 투쟁 준비에 바쳐 온 이 대주교는 협곡에 1,500~2,000명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튀르크군을 기다렸습니다. 승산은 없었고, 아마도 시간을 벌어주는 것 이상의 희망은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1821년 6월 15일, 비극의 전투

1821년 6월 15일, 튀르크군은 소수의 그리스인들을 공격했고, 압도적인 병력과 기병·포병 화력을 앞세워 곧바로 승기를 잡았습니다. 콘스탄티오스 대주교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할키디키 북부로 피신했으며, 일부는 포티데아(Potidea) 협곡에 방어진을 구축해 튀르크군의 공격을 격퇴하기도 했습니다.

대주교의 최후와 마케도니아의 참화

영웅적인 대주교는 아토스산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는 수개월 동안 죽음과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1821년 10월 말 눈을 감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튀르크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튀르크군은 그들의 관습대로 주변 마을들을 유린하며 학살과 방화,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튀르크군은 무려 42개 마을과 정착촌을 파괴했습니다...

1821년 마케도니아의 테르모필레: 끝까지 저항한 콘스탄티오스 마로네이아스 대주교

▲ 마케도니아 전사들의 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