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로이아(Beroia)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세운 그리스 도시로, 오늘날 불가리아의 스타라자고라(Stara Zagora)로 알려져 있다. 1122년 이 도시 근교에서 벌어진 유명한 전투는 파체네그, 즉 페체네그(Pecheneg)라는 민족을 역사 속 민족 목록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전투였다.
비잔틴의 오랜 숙적, 페체네그
페체네그는 비잔틴 영토를 끊임없이 약탈해 온 오랜 숙적이었다. 1091년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코무네노스는 에브로스 강 하구 인근에서 벌어진 레부니온 전투에서 이들을 사실상 궤멸시켰다.
그러나 당시 모든 페체네그 부족이 침공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초원에서 내려온 이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제국 영토로 침입했다. 페체네그는 키예프의 루스 통치자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허락을 받아 그의 영토를 통과한 것으로 보인다.
1121년, 새로운 침공
당시 대부분의 페체네그가 그의 휘하에서 복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페체네그는 우즈 튀르크(Ughuz Turks)와 함께 1121년 러시아에서 출발해 제국 영토를 침공했다. 새로운 침공 소식에 콘스탄티노플은 크게 동요했고, 알렉시오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신임 황제 요안니스 2세 코무네노스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셀주크 튀르크와 교전하며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맞서기로 결심했다.
황제는 군대와 함께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넜다. 비잔틴군은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했다. 한편 페체네그는 이미 발칸(아이모스) 산맥을 넘어 남하하던 중이었고, 마침내 베로이아에 진영을 꾸렸다.
황제는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늉을 했다. 요안니스는 협상을 원하는 척 연기하는 동시에 군대를 이끌고 적에게 진격했다. 이러한 판단은 사건의 경과에서 도출된 결론이다.
결정적 충돌
어느 날 아침 비잔틴군이 수레로 방벽을 쌓은 진영 앞에 나타나자 페체네그는 완전히 기습당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급히 대열을 갖춰 평원 위에 전개했다. 페체네그는 당시 모든 튀르크계 민족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기마궁수였다.
그들은 느슨한 대형으로 싸우며 돌진하고, 화살을 쏘고, 물러나는 고전적 전술을 구사했다. 상대가 충분히 지쳤다고 판단될 때만 돌격을 감행했다. 또한 귀족과 족장들의 호위로 이루어진 소수의 중장기병도 거느리고 있었다. 반면 보병은 주목할 만한 전력이 못 되었는데, 말을 탈 수 없는 무장 가능한 자라면 누구든 징집된 부대였다.
페체네그의 병력 규모는 물론, 황제가 직접 이끈 비잔틴군의 편성과 숫자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비잔틴군이 적에게 돌진했지만 페체네그와 우즈는 익숙한 전술로 이들을 압도했고, 질식할 듯 압박당할 때마다 요새화된 진영 안으로 후퇴했다. 실제로 화살 한 발이 요안니스의 다리에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전사(戰士) 황제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근위대의 정예 바랑기아인(Varangians)에게 적의 수레 방벽 공격을 명령했다. 그들은 적의 화살 세례를 뚫고도 놀라운 용기로 진격했고, 창으로 적의 수레를 하나씩 부수며 적의 '불길'을 무시했다.
마침내 다른 비잔틴군의 엄호 아래 통로가 열렸고, 비잔틴군은 그 틈으로 적진에 쇄도해 상대를 잔혹하게 학살했다. 기동할 수 없게 된 튀르크 기마궁수들은 더 중무장한 적들에게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채 수천 명씩 베여 나갔다.
살아남은 페체네그는 포로로 잡혔고, 일부는 비잔틴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베로이아 전투 이후 페체네그라는 민족에 대해 다시 들은 바는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말살의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