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튀르크에 맞선 봉기와 버려진 그리스인들
17세기 마지막 25년, 그리스 중부의 산악 지방 포키스에서 오스만 제국(튀르크)에 맞선 또 한 차례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 봉기를 이끈 것은 '쿠르마스'라 불리던 지도자였으며, 베네치아가 그를 지원했습니다. 역사가 콘스탄티노스 사타스는 당시의 장면을 인상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살로나의 주교 필로테오스가 오른손에는 십자가를, 왼손에는 검을 들고 봉기군 곁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베네치아인들은 다시 한번 그리스인들을 외면했습니다. 홀로 남겨진 그리스인들은 튀르크의 끔찍한 보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살길을 찾아 바다로 나간 많은 그리스인들이 해적이 되었고,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리도리키 출신의 카프시 형제, 즉 '트로마라스'라 불린 얀니스와 니코스였습니다.
에게해를 누비던 카프시 형제
형제들은 두 척의 작은 배를 무기 삼아 아이톨로아카르나니아의 미티카에서 출발해 에게해 곳곳을 습격했고, 그 활동 범위는 헬레스폰토스 해협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항해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얀니스 카프시는 밀로스 섬에서 한 처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뒤 그 섬에 정착하게 됩니다. 한편 그의 동생은 프랑스 군함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인들은 그를 튀르크에게 넘겼고, 그는 튀르크의 구타 끝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동생의 죽음을 안 얀니스는 니코스와 다시 합류하여, 동생의 참혹한 죽음에 대한 복수라는 명분 아래 더욱 과감한 해적 활동을 감행했습니다.
1677년, 해적이 세운 자유 그리스 국가
카프시의 대담한 공격에 시달린 튀르크는 그를 붙잡는 것조차 포기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1677년, 카프시는 부하들과 함께 밀로스 섬에 상륙해 자신만의 자유로운 그리스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는 튀르크의 지배를 종식시켰고, 섬에 그리스 정교회 주교가 없었던 관계로 라틴(가톨릭) 주교로부터 즉위 의식을 거행하며 '밀로스의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카프시의 국가는 섬의 그리스인과 라틴 주민 모두의 인정을 받았으며, 여러 문제로 분주했던 튀르크조차 사실상 묵인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카프시는 자신의 '국가'를 질서 있게 잘 운영했고, 3년 동안 튀르크는 그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배신과 비극적인 최후
그러나 카프시에게 고무된 다른 섬들에서 봉기가 잇따르자, 튀르크는 마침내 개입을 결심합니다. 세 척의 튀르크 군함이 밀로스로 항해해 왔고, 튀르크 지휘관은 우정을 가장하며 카프시를 자신의 배로 초대해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카프시는 그를 믿은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튀르크 배에 올라탄 순간 그는 즉시 사슬에 묶여 도시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1680년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렇게 해적 출신 그리스인이 세운 최초의 독립 그리스 국가는 비잔티움 멸망 이후 불과 몇 년 만에 수치스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카프시 형제의 이야기는 오스만 지배 시절 그리스인들의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