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망 속에 벌어진 이테아 해전
1827년, 그리스 독립전쟁은 최악의 국면을 맞고 있었다. 지도부의 잇딴 실책으로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이집트군이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안착할 수 있었고, 메솔롱기는 이미 함락된 뒤였다. 이집트군은 모레아(Morea) 일대를 초토화했고, 같은 시기 쿠타히 파샤의 군대는 로우멜리(Roumeli) 지방을 유린했다. 그리스 혁명군의 손에 남아 있는 영토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처럼 암울한 상황 속에서 이테아 만, 이른바 아갈리스(Agalis) 만에서 해전이 벌어졌다. 1827년 9월 말, 그리스 최초의 증기추진 군함 '카르테리아(Karteria)'는 코린토스 만으로 출항해 그리스 육군 부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함장은 그리스인들이 '아스티크스(Astyx)'라 불렀던 영국 출신 친그리스주의자 프랭크 애브니 헤이스팅스(Frank Abney Hastings)였다.
그리스 함대 3척은 이미 아갈리스 만에 진입해 있었지만, 적 함선과 해안 포대를 상대로 단독 공격을 감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터키-이집트 연합군은 함선 10척(수송선 3척 포함)을 보유한 데다, 해안에 포대를 구축해 그리스의 어떤 공격도 막을 준비를 마쳐 두고 있었다.
감행된 그리스의 공격
1827년 9월 30일, 그리스 함대는 적 함선에 접근했다. 터키-이집트군은 겨우 4척뿐인 그리스 함선을 보고서야 적이 감히 자신들을 공격할 만큼 무모한 짓을 저지를 리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스티크스의 생각은 달랐다. '카르테리아'의 화력을 믿은 그는 적 선박에서 500미터 이내까지 접근한 뒤 닻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카르테리아'는 사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한 발을 발사했다. 터키-이집트군은 즉시 모든 대포로 응사하며 화력을 '카르테리아' 한 척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리스 군함은 포탄으로 맞대응하며 적 함선의 승무원들과 해안 포대의 포수들을 문자 그대로 쓸어버렸다.
이윽고 적 함선 위에서는 광기 어린 광경이 펼쳐졌다. '카르테리아'와 브릭선 '소티르(Sotir)', 그리고 나머지 두 그리스 함선의 포탄이 배와 사람을 산산조각 냈다. 폭발성 포탄의 사용으로 터키-이집트 함선 3척이 파괴되었다. 해안 포격도 잦아들었고, 대포 곁에서 산산조각 난 채 쓰러지지 않은 포수들은 도주해 버렸다.
곧이어 그리스군은 적 함선 2척을 나포하고 나머지를 불태웠다. 이 승리는 그리스의 사기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소중한 의미를 지녔다. 이브라힘은 사태를 알게 되자 '카르테리아'를 반드시 파괴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해전은 며칠 뒤 이집트 함대가 궤멸당한 유명한 나바리노(Navarino) 해전의 촉매제가 되었다.
세계 최초의 실전 참전 증기군함, '카르테리아'
'카르테리아'는 세계 해전 역사상 최초로 실전에 참여한 증기추진 군함이다. 그리스 혁명 해군을 강화하기 위해 아스티크스(헤이스팅스)의 설계 지시에 따라 1825년 영국에서 건조되었다. 건조 비용은 영국이 그리스에 제공한 차관금과 아스티크스의 사재로 충당되었다.
배수량 233톤에 돛대 4개를 갖춘 이 선박은 좌우 현측에 각각 하나씩, 총 2기의 작은 증기기관이 구동하는 외륜(패들 휠)을 장착하고 있었다. 무장은 대포 4문과 카로네이드(carronade, 단포신 포) 4문뿐이었으나, 모두 중량급 68파운드포였다.
1826년 취역한 이 배는 순식간에 터키인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827년 한 해 동안만 적에게 18,000발을 발사했는데, 이는 활동 범위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이테아 해전은 바로 이 배의 활약이 정점에 달한 순간이었다.

증기기관을 갖춘 '카르테리아'.

영국 출신 친그리스주의자이자 왕립해군 출신 베테랑, 프랭크 아스티크스(헤이스팅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