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동인도회사 250년 흥망사: 민간 무역회사가 어떻게 바다와 무역, 그리고 영국을 정복했나

동인도회사 250년 흥망사: 민간 무역회사가 어떻게 바다와 무역, 그리고 영국을 정복했나

영국은 섬나라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닙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만큼 영국인들은 일찍부터 바다를 활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섬나라 → 상선 → 동인도회사 → 대영제국'이라는 직행 코스를 상상한다면, 역사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실 영국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해양 국가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무역이라 해봐야 영국 해협을 건너 프랑스나 플랑드르로 향하는 수준에 그쳤고, 대규모 해군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륙에 영토를 보유하고 있던 영국은 본질적으로 유럽의 육상 강국이었던 것입니다.

바다로의 전환은 한참 뒤에야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국내의 반대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곧바로 결실을 맺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영국의 정체성을 만들어냈습니다. 무역이 시작되고 군대가 바다로 시선을 돌린 지 불과 수십 년 만에 국가와 경제의 구도는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이 변화의 최전선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민간 기업, 영국 동인도회사가 있었습니다.

동인도회사로 가는 길: 식민주의의 시작

사실 영국은 오랫동안 항해의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해양 민족들의 희생자였습니다. 바이킹 시대의 약탈은 중세 영국이 바다를 통해 얼마나 취약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런데 한참 뒤에야 섬나라 영국이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15세기 유럽 열강들은 강력한 해군이 원거리 작전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입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중해에서는 베네치아나 제노바 같은 도시들이 오래전부터 이를 보여줬지만, 대서양에 진정한 해양 강국이 등장한 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부상 이후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의 내정도 15세기에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세기 중반 백년전쟁이 끝나며 유럽 대륙의 영국 영토는 거의 모두 프랑스에 넘어갔고, 영국은 완전한 섬나라가 된 것입니다.

16세기 초, 헨리 8세가 공식적으로 영국 해군을 창설했습니다. 그 효과는 불과 수십 년 만에 입증되었습니다. 1588년, 영국 해군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물론 행운과 날씨가 영국 편에 기운 측면이 있었지만요. 늦어도 이 무렵부터 엘리자베스 1세와 정부는 강력한 해군이 국가 방어의 필수 요소임을 확실히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야망은 순식간에 자기 방어의 범위를 넘어섰고, 1600년 마침내 엘리자베스 여왕은 앞으로 200년간 전 세계에서 영국의 부를 이끌어갈 조직, 동인도회사의 헌장에 서명합니다.

시작은 매우 소박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새로운 유한회사에 희망봉 동쪽 영국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단 15년간만 부여했습니다. 기한이 정해져 있었던 데다, 당시 그 해역의 무역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거의 독점하고 있었기에 이 독점권은 현실적으로 큰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동인도회사는 활동 첫해부터 놀라운 성과를 거둡니다. 당시 인도 대부분을 다스리던 무굴 대제국으로부터 교역소 설치 권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기한이 정해진 독점권은 곧 무기한으로 연장되었고, 회사의 번영은 예정된 수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곧 더 확대될 예정이었습니다.

무역회사가 '국가'가 되다

당시 영국의 원거리 무역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 경쟁자들과 끊임없이 충돌해야 했습니다. 해당 지역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스스로 군대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권리를 영국 국왕 찰스 2세가 1660년대에 동인도회사에 하사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회사는 자체 군대를 창설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재정을 조달하고 독립적으로 전쟁을 선포하며, 해당 지역에 대한 관할권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회사는 하나의 국가가 되었고, 통치하던 인도 지역에서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얼마 후 무굴 제국이 쇠퇴하자 동인도회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도 아대륙의 상당 부분에 대한 통치권, 즉 정치적 지배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민간 무역회사에 맡겨야 할 권한이 아니었음에도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습니다. 18세기에는 회사 주주들이 본국 영국에서도 중요한 정치적 권한을 쥐고 있었습니다.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며 해외에서 부를 축적한 이른바 '나봅(nabob)'들이 영국으로 돌아와 의회 의석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야심 찬 나봅은 주민이 거의 살지 않는 선거구에서 최대한 많은 토지를 매입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국회의원이 백 표 미만으로도 웨스트민스터의 의석을 얻을 수 있는 '썩은 선거구(rotten borough)'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선거는 거수 투표로 공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지주인 집주인이 지역 유권자 대부분의 표를 받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습니다.

이로써 영국 동인도회사와 영국 정부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회사는 인도의 자체 주처럼 행동하며 주주와 본국에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고, 그들은 다시 회사를 더욱 강화하는 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상원에 자주 출석하던 옛 주주들은 하원의 나봅들과 손잡았고, 동인도회사를 견제하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회사의 정치 시스템은 스스로를 재생산했습니다. 거품이 터질 때까지 말입니다.

실패하기엔 너무 컸다

동인도회사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무역회사였습니다. 목적도 기능도 무역이 우선이었고, 임무는 주주에게 수익을 안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회사는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체 군대, 자체 행정부, 심지어 자체 사법부까지 갖춘 채 인도에서의 사업은 계속 팽창했습니다. 물론 현지 인도 주민들이 이로 인해 특별한 혜택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문제는 회사 자체도 어느 순간 이 거대한 체제에 짓눌리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지출은 너무 컸고, 경기 변동으로 수요가 부진해지면서, 1770년대 초 세계 최강의 민간기업 동인도회사는 마침내 파산 직전에 몰렸습니다. 그래서 회사는 오늘날 대기업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영국 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것입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모든 이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실패하기에는 너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런던 의회는 단순한 현금 지원 대신, 동인도회사에 더 많은 특권을 부여해 사업의 수익성을 되살리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런던은 또한 회사가 북미 식민지에서 국가 개입 없이 차 무역을 조직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미국의 차 가격을 낮추려 했습니다. 정부가 미국으로의 차 수입 관세를 그저 폐지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을 것입니다. 미국 정착민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보스턴 차 사건'으로 응수했습니다. 그리하여 영국은 곧 첫 번째 식민지를 잃게 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동인도회사의 느린 쇠퇴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1773년 규제법에 따라 의회는 수많은 회사의 권한을 국왕에게 직접 이관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동인도회사는 정치적 영향력을 점차 상실해 갔습니다. 마침내 1858년, 국가는 인도에 있는 회사의 영토를 인수했고, 인도는 법적으로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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