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서 배신자 하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꼽히지만, 서양의 배신자를 말할 때는 유다, 브루투스, 그리고 카시우스가 가장 먼저 거론됩니다.
실제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문호 단테는 걸작 『신곡』에서 이 세 사람을 지옥 최심부의 얼음 호수 코키토스에서 악마의 왕 사탄에게 영원히 씹히는 중죄인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만큼 배신은 서양 문화에서 가장 무거운 죄로 여겨진 것입니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저지른 짓은 암살만이 아닙니다. 오늘은 그의 배신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펴보겠습니다.
크라수스를 버리고 적 앞에서 도망치다
제1차 삼두정치의 주역 세 사람은 각자 로마 팽창에 공헌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스페인, 북아프리카, 시칠리아를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그리스와 시리아를 정복하고 이집트 정세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광활한 갈리아를 정복해 오늘날의 선진국인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개국, 독일 서부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반면 크라수스는 불행하게도 뚜렷한 업적 없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굳이 꼽자면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 정도인데, 이마저도 실상은 폼페이우스의 공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크라수스는 그저 돈 많은 부자로 기억될 뻔했습니다. 아마도 그런 조급함이 발목을 잡았던지, 그는 동방의 강대국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크라수스는 신흥 부유층인 에퀴테스(기사 계급) 출신으로 군사적 재능이나 교양이 부족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장군들의 경멸을 샀고, 특히 카시우스에게는 늘 멸시받았다고 전해집니다.
기원전 53년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는 참패하고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본 카시우스는 기병대를 이끌고 적의 눈앞에서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카시우스라는 인간의 본색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후 크라수스의 죽음과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의 죽음으로 삼두정치가 붕괴하자, 카시우스는 자신의 처세를 위해 폼페이우스 편에 섭니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카이사르 대립의 선봉으로 세우는 데 성공하지만, 정작 카이사르가 기세등등하게 몰아오자 또 도망칩니다.
두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가 승리했을 때, 카시우스는 장기전을 택하려는 폼페이우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파르살루스에서 조기 결전을 강요했고, 그 결과 역사적인 대패를 낳고 맙니다.
그런 무능한 카시우스를 카이사르는 용서합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인들의 손에 살해당했지만, 카시우스는 발빠르게 카이사르에게 용서를 구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카이사르는 그를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프라이토르(법무관)라는 요직에까지 앉혔습니다.
카이사르는 누구나 인정하는 관대하고 너그러운 인물이었지만, 그 관용이 결국 치명타가 됩니다.
용서에는 상대를 가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카이사르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일 것입니다.
카이사르 암살과 배신자의 최후
카시우스가 어떻게 암살 음모자들을 규합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카이사르의 정부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자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브루투스를 설득해 암살의 길로 끌어들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사당에서 암살당합니다. 카시우스는 카이사르를 죽이면 자신이 로마의 영웅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로마 시민 대다수는 암살을 지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한 시민들은 암살자들을 몰아붙였습니다. 늘 그렇듯 이런 부류는 도망만큼은 빠릅니다. 카시우스는 즉시 시리아로 달아나 무력을 배경으로 혹독한 수탈을 감행하며 군비를 확장했고,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연합군과 기원전 42년 필리포이에서 격돌했습니다.
결과는 패배. 포로가 된 뒤의 처우가 두려웠는지, 그는 결국 자신의 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을 배신한 자들의 결말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세상에는 어떻게 해도 손을 쓸 수 없는 인간이 있는 법입니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야말로 그 전형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