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는 자신의 아이들을 잡아먹고 있다." 이 슬픈 보편적 진실은 1940~41년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의 위대한 영웅 중 한 사람인 모르도카이오스 프리지스(Mordochaios Frizis) 중령에게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하랄람보스 카치미트로스와 함께 싸운 동료였고, 잊힌 바실리오스 브라크노스, 소티리오스 무투시스, 그리고 1940년대 '영웅 서사시'의 수천 명 무명 용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또 하나의 잊혀진 영웅이다.
다만 프리지스의 경우에는 조금 특별한 사정이 있다. 그가 유대교 신자였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1940년뿐 아니라 1912년 이후 국가를 위해 싸워 온 모든 전역에서 그의 공로가 제대로 인정받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할키다에서 태어나다
모르도카이오스 프리지스는 1893년 1월 1일 에우보이아 섬의 항구 도시 할키다(Chalkida)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크리스피(Crispi) 가문 출신으로, 이 가문의 일원들은 비밀결사 필리키 에테리아(우호회) 회원으로서 1821년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집안이었다.
좌절된 사관학교 꿈, 그리고 군 입문
모르도카이오스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군인 기질을 드러냈다. 그러나 당시 만연한 종교적 편견을 넘지 못해, 입학 시험을 쉽게 통과했음에도 에벨피돈 사관학교 입학은 좌절되었다. 대신 그는 아테네 대학교 법학부에 들어가 학업을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평범한 변호사로 살게 하지 않았다. 징집 소집을 앞두고 그는 부사관학교에 자원 입교했고, 중사 계급으로 졸업했다.
발칸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선
프리지스는 발칸 전쟁에 부사관으로 참전하여 용맹함과 뛰어난 행정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상관들은 그의 가치를 알아보고 고향 할키다의 예비역 장교학교에 그를 보냈고, 그는 예비역 소위 계급으로 졸업했다. 이 계급으로 마케도니아 전선에 투입된 그는 다시 한번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우크라이나 원정과 정규 장교의 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리지스는 포상으로 진급했고, 1919년 10월에는 소위 계급으로 정규 장교가 되었다. 법학 전공 덕분에 라리사(Larissa) 군법회의에 배치되었지만, 그 자신은 군복을 입은 변호사조차 되고 싶지 않았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그는 태생적인 군인이었고 조국에 기여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제1군단의 우크라이나 작전 참여를 자원했다. 그곳에서도 그는 뛰어난 활약으로 이름을 날렸다.
소아시아 전선, 정치를 거부한 군인
우크라이나 원정이 끝나자 프리지스는 헬레니즘의 새로운 전장, 곧 고대 그리스의 땅 이오니아(소아시아)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프리지스는 열정적으로 싸웠다. 주목할 점은, 베니젤로스파와 왕당파의 대립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도 그는 정치에 결코 휘말리지 않은 몇 안 되는 그리스 장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군 경력 내내 이 태도를 끝까지 지켰다. 그가 말했듯 그는 '이런 저런 정치 지도자나 군 지도자의 병사'가 아니라 '그리스의 병사'였다. 소아시아에서 소위 신분이었던 그는 실질적으로 중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고 상관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덕분에 중위로 진급했고 금십자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그 이전에는 러시아로부터 검(劍)이 더해진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을 받은 바 있다. 1922년 3월, 그는 볼로스(Volos) 출신 빅토리아 하임 코스티(Victoria Heim Costi)와 결혼했다. 하지만 신혼의 여유도 잠시, 그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포로가 된 장교, 명예를 지키다
1922년 8월 터키군의 대공세 때 프리지스는 소아시아에 있었다. 그는 스미르나(Smyrna, 오늘날 이즈미르) 방면으로의 후퇴 도중 수천 명의 동료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그는 그리스 육군에서 유일한 비기독교계 장교였다. 물론 터키 측도, 스미르나의 유대인 공동체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동체는 즉시 상당한 몸값을 모아 터키 측에 '바흐치시(bahşiş, 팁)'로 건네며 프리지스의 석방을 요청했다. 터키 측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단, 그가 다시는 자신들과 싸우지 않겠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포로가 된 장교에게 다가간 이들은 놀라고 말았다. 프리지스는 자신의 운명을 다른 포로 동료들과 갈라놓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석방 제안 자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차갑게 답했다.
"우리 그리스인은 스스로 해방됩니다."
그는 그리스의 장교였다. 자신의 신념과 조국과 국기를, 그리고 전우들을 배신하고서라도 혼자 살아남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불명예는 그리스 장교의 품성이 아니었다. 프리지스의 영혼은 그토록 그리스적이어서, 이름만 정교회 신자인 많은 동시대인의 영혼이 그 신념과 행동에 미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귀환과 대위 진급
프리지스는 마침내 1923년 8월 석방되어 그리스로 돌아왔고, 볼로스 수비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지휘관은 불과 두 달 만에 그의 진급을 추천하며 당국에 이렇게 보고했다.
"근무 기간 내내 그는 직무에 대한 열정과 훌륭한 품행을 보여 왔다. 백과사전적 교양을 갖추었으며 직무 수행에 완전히 적격이다. 정직하고 규율 있으며 학구적이다."
이렇게 하여 프리지스는 1923년 12월 대위로 진급했다. 또한 소아시아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2등 군사무공훈장과 3등 군사십자장을 추가로 수여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