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령자가 남긴 상흔, 그리스 전역에 흘린 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스를 점령한 독일군은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하는 일에서 옛 침략자들에 필적할 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잔혹했습니다. 점령 첫 몇 달부터 전국 곳곳의 도시와 마을이 유혈의 비극에 휩싸였고, 희생자 대부분은 아무 죄도 없는 평범한 주민들이었습니다.
특히 크레타 섬은 주민들의 영웅적인 저항으로 섬 함락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만큼, 독일 정복군의 보복이 집중적으로 가해져 처참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1941년 10월, 하니아 지역 한 마을의 처형
1941년 10월, 독일 장교 한 명이 이끄는 부대가 크레타 하니아(Chania) 지역의 한 마을을 포위했습니다. 독일군은 주민들을 마을 광장으로 모이라 명했고, 모인 사람들은 거의 여성과 아이들뿐이었습니다.
"이 마을의 남자들은 어디 있는가?" 장교가 물었습니다. 주민들은 "몇몇만 남아 있다"고 답했습니다.
장교는 "18세에서 42세 사이의 건강한 젊은 남자 25명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해당 연령대의 남자는 16명밖에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인원을 세어 본 장교는 말했습니다.
"모자라니, 연령 제한을 16~55세로 바꾸겠다."
그래도 23명밖에 모이지 않자, 숫자를 맞추기 위해 15세 소년과 노인 한 사람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은 이들을 둘러싼 뒤, 장교의 신호와 함께 기관총을 난사해 마을에 남아 있던 소수의 남자들을 몰살시켰습니다.
산 채로 생매장당한 희생자들, 키르토마도스 마을
1941년 크레타 키르토마도스(Kyrtomados) 마을에서는 요안니스 포라키스(Ioannis Forakis)와 쿠초기안나키스(Koutsogiannakis)가 독일군의 처형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뒤 산 채로 생매장당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피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입에 흙을 채워진 채였다고 전해집니다. 더 참혹하게도, 그들의 친척들은 처형대에게 식사까지 차려 내놓으라 강요당했습니다.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야 했던 게라니 마을 주민들
같은 해인 1941년, 레티므노(Rethymno) 지역 게라니(Gerani) 마을에서는 25명의 주민이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 처형 직전 자신들의 무덤을 스스로 파야 했습니다. 그들의 죄명은 단지 크레타 전투에 참전한 사람들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지막 수업', 파파다키스 교사의 최후
1942년 6월, 크레타 모이레스(Moires) 지역에서는 파파다키스(Papadakis) 교사가 민족을 위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다른 주민들과 함께 처형대에 섰습니다.
처형 직전 독일군이 "유언이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교사는 "예, 함께 여로를 떠날 동료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곧 죽음을 맞이할 크레타인들에게 몸을 돌려 말했습니다.
"30년 동안 나는 여러분에게 애국가를 가르쳐 왔다. 얘들아, 오늘 우리는 함께 마지막 수업을 갖게 되겠구나……"
모두가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와 연합국을 위해 환호했고, 자유를 위하여 쓰러졌습니다.
잊지 않기 위한 기록
이 이야기들은 당시 그리스 기록 보관소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기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