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에스키세히르 1921… 그리스 기병대, 튀르크군을 격파하다

에스키세히르 1921… 그리스 기병대, 튀르크군을 격파하다

1921년, 그리스 육군은 이미 한동안 소아시아(아나톨리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수적으로는 소규모였던 기병은 작전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곧 이곳 그리스인들의 '조국'에서 새로운 영광의 장을 써 내려가게 된다.

재편성을 마친 기병여단

1921년 6월, 같은 해 봄 제3군단(SS) 작전에 참여했던 기병여단(TI)은 재편성 과정에 있었다. 여단은 4개 기병중대를 둔 제1기병연대(SI)와 역시 4개 중대를 보유한 제3기병연대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승마 기관총 중대(기관총 24정), 기마 포병(75mm 야포 4문), 기마 공병 분견대까지 갖추고 있었다.

니콜라이디스 대령이 지휘하는 기병여단은 다가오는 아나톨리아 방면 작전에 대비해 우샤크로 이동했다. 여단의 임무는 보병과 협동하여 튀르크군을 쿠타히야 방면에서 우회·차단하는 것이었다.

우츠 사라이 전투

7월 3일, 기병여단은 에스키세히르 동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음 날 튀르크군은 강력한 병력으로 우츠 사라이에 주둔한 그리스 제14보병연대(SP)를 맹공했다. 공격은 그 다음 날까지도 이어졌고, 그리스 보병은 숨통이 조여드는 위기에 몰렸다.

기병여단은 하마 전투로 튀르크군을 저지해 나갔다. 그러나 제14보병연대의 우익이 무너지면서, 다수의 기병까지 보유한 튀르크군이 그리스군의 섬멸을 노리는 절체절명의 국면에 이르렀다. 이를 막기 위해 부지휘관 스피리돈 마르코풀로스는 제1기병연대 소속 제1·제2중대를 직접 이끌고 튀르크군에 대한 반격을 감행했다.

그리스 기병들은 검을 뽑아 들고 죽음을 무릅쓴 돌격을 감행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튀르크군은 이 진격을 막아냈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대위 1명을 포함해 53명과 말 80필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병여단 참모차장이던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중령(훗날 원수에 오르는 인물)의 결단 덕분에 귀중한 시간을 벌어냈다. 기병은 연속적인 진지로 기동하며 보병의 후퇴를 엄호하고 튀르크군을 지연시켰다. 적이 입은 피해는 너무 컸고, 결국 튀르크군은 추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아크부나르로의 진격

우츠 사라이 전투 이후 기병여단은 아크부나르 방면으로 이동했다. 7월 8일, 튀르크군은 에스키세히르 탈환과 그곳의 그리스군 섬멸을 노린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기병은 적의 움직임을 제때 포착해 그리스 보병 사단들 사이의 빈틈을 메워 나갔다. 그러나 동시에 지울 수 없는 영광의 한 페이지를 남기게 된다. 튀르크군의 압박을 목격한 여단은 바르티 대령 지휘하의 제3기병연대에 반격을 명령했다. 두 개 중대를 이끈 것은 용맹한 키프로스 출신 군관 요안니스 차가리디스(제1중대장)와 당시 중대장 게오르기오스 스타노타스(제2중대장, 훗날 1940~41년 기병사단장)였다.

그리스 기병들은 검을 뽑아 들고 나팔 소리에 맞춰 청백기를 휘날리며 "아이라(Aera)!"의 함성을 높이 울리며 돌진했다. 기습을 당한 튀르크군은 놀라고 어찌할 바를 몰라 패닉 상태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했고, 기병들은 그 뒤를 끝까지 추격했다. 그리스군은 4km에 걸쳐 적을 몰아붙여 500명 이상을 살상하고 100명을 생포했다! 정작 제3기병연대의 손실은 기병 단 한 명뿐이었다. 대승이었다.

영웅 차가리디스

부지휘관이었고 훗날 장군이 된 요안니스 차가리디스를 언급할 가치가 있다. 그는 1887년 키프로스 라피토스에서 태어났다. 공부하기 위해 아테네로 떠났지만 모든 것을 접고 마케도니아 투쟁에 자원하여 싸웠다.

귀국 후에는 부사관으로 그리스 육군에 입대했고, 기병 장교로 승진하여 발칸 전쟁, 특히 소아시아 전역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다. 상가리오스 작전에서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정치에 휘말려 1939년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에스키세히르 1921… 그리스 기병대, 튀르크군을 격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