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포르투갈 출신의 탐험가이자 항해사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조국의 깃발이 아니라 경쟁국 스페인의 후원 아래 인류 최초의 지구 일주 항해를 이끌었습니다. 조국을 등지고 이적을 감행한 그의 선택 뒤에는 국왕과의 갈등, 커다란 야망, 그리고 당시 유럽을 뒤흔든 향신료 무역의 판도가 얽혀 있었습니다.
모욕당한 충성, 포르투갈 궁정과의 결별
마젤란은 젊은 시절 인도와 말라카, 북아프리카 원정에 참전하며 당대 최고 수준의 항해 지식과 전투 경험을 쌓은 실력파였습니다. 그러나 귀국 후 그는 무어인과의 불법 교역 혐의라는 누명을 쓰게 되고,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입은 부상에 대한 보상 문제로도 국왕 마누엘 1세에게 번번이 거절당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항해 계획 역시 궁정에서 외면받았습니다. 충성을 바쳤던 조국이 돌려준 것은 모욕뿐이었고, 결국 1517년 마젤란은 포르투갈 국적을 버리고 스페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합니다.
서쪽으로 가는 향신료 항로
당시 향신료 무역은 유럽에서 가장 값진 사업이었습니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새로 발견되는 땅은 자오선을 기준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나눠 가졌는데, 포르투갈은 이미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향신료 제도(몰루카 제도)로 이어지는 동쪽 항로를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마젤란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을 돌아 서쪽으로 항해하면 향신료 제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에는 이미 안정된 동쪽 항로가 있었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큰 서쪽 원정에 투자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반면 스페인에게 이 계획은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를 손에 넣을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새 주군, 스페인 국왕을 만나다
1517년 스페인 세비야에 도착한 마젤란은 젊은 국왕 카를로스 1세(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원정 계획을 제안했고, 스페인 왕실은 이를 크게 환영했습니다. 마젤란은 스페인 귀화를 허락받았을 뿐만 아니라 발견할 땅의 총독직과 원정 사령관이라는 화려한 조건까지 약속받습니다.
1519년 9월, 마젤란은 다섯 척의 배와 약 270명의 선원을 이끌고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항을 출발했습니다. 자국 출신 항해사가 항해 비밀을 들고 떠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포르투갈은 원정을 저지하려는 시도까지 했다고 전해집니다.
완성된 꿈, 세계 일주
원정대는 1520년 남아메리카 최남단의 험준한 해협, 오늘날 마젤란 해협으로 불리는 길을 통과해 처음으로 태평양에 진입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젤란 본인은 1521년 필리핀 막탄섬에서 현지 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만니다.
그러나 항해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1522년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가 이끄는 빅토리아호가 18명의 생존자와 함께 세비야로 귀환하면서, 이 원정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지구 일주 항해로 기록되었습니다.
만약 포르투갈 궁정이 마젤란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왕의 냉대는 위대한 항해사를 스페인으로 내보냈고, 그 결과 스페인은 지구 일주라는 영예를 손에 넣게 됩니다. 마젤란의 이적은 개인의 설움이 세계사의 큰 전환점이 된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