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2월, 주미 스페인 공사 엔리케 뒤퓌 드 로메(Enrique Dupuy de Lôme)가 스페인 외무장관 호세 카날레하스에게 보낸 개인 서한이 미국 언론에 유출되면서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른바 '드 로메 편지(De Lôme Letter)'로 불리는 이 문서는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치닫는 결정적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편지에 담긴 충격적인 내용
드 로메는 편지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를 "약하고 군중의 눈치만 보는 인물"이라고 폄하했으며, 미국 언론이 스페인을 상대로 "야만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한 나라의 외교관이 주재국 정상을 공개적으로 모욕한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외교적 스캔들이었고, 미국 국민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리는 발언이었습니다.
편지 유출과 언론 보도
운명적으로 이 편지는 쿠바에서 활동하던 쿠바 독립운동 세력에게 가로채졌고, 그들은 곧바로 이를 미국 언론에 넘겼습니다. 1898년 2월, 뉴욕 저널(New York Journal)이 편지 전문을 게재하자 미국 전역이 들끓었습니다. 당시 미국 언론은 허스트와 퓰리처가 주도하는 선정적인 황색 언론(journalism) 시대였고, 쿠바 독립 전쟁 관련 보도로 반(反)스페인 여론이 이미 고조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여론의 격화와 전쟁 발발
매킨리 대통령에 대한 경멸적인 표현에 분노한 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드 로메는 결국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 사건은 스페인에 대한 적개심을 한층 부채질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2월 15일에는 미국 순양함 메인호(USS Maine)가 쿠바 하바나 항에서 폭발해 침몰하는 사건이 터졌고, 많은 미국인들은 이를 스페인의 소행으로 의심하며 "메인호를 기억하라(Remember the Maine)!"라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결국 1898년 4월, 여론에 못 이긴 미국 의회와 행정부는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국-스페인 전쟁(Spanish-American War)에 돌입하게 됩니다. 단 한 통의 개인 편지가 아니라, 편지의 내용과 유출 과정, 그리고 당시 미국 사회의 팽팽한 여론이 결합해 전쟁의 도화선 역할을 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