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0년대와 1650년대 올리버 크롬웰이 아일랜드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모든 아일랜드인이 그에게 적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종교적 신념, 정치적 계산, 그리고 무엇보다 생존이라는 현실적 이유로 크롬웰과 의회파를 지지하거나 협력한 세력들이 존재했습니다.
크롬웰을 지지·협력한 주요 세력
얼스터의 개신교 정착민
1641년 아일랜드 반란 이후 큰 피해를 입었던 얼스터 지역의 영국·스코틀랜드계 개신교 정착민들은 크롬웰의 원정을 절호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지키고 가톨릭 다수파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확립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크롬웰군의 가장 확고한 지지 기반이 되어주었습니다.
오몬드 진영에서 이탈한 개신교 왕당파
영국 왕실에 충성하던 오몬드 공작 휘하의 아일랜드 개신교 왕당파 중 일부는 가톨릭 연맹과의 불편한 동맹에 염증을 느꼈습니다.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전세가 기울면서, 이들은 가톨릭 경쟁 세력을 누르는 수단으로 의회파에 귀순하는 길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항복 후 협력한 가톨릭 연맹 인사들
아일랜드 가톨릭 연맹은 명목상 왕당파와 손잡고 크롬웰에 맞섰지만, 군사적 패배가 거듭되자 내부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부 인사와 도시들은 유리한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고 새 정권에 순응했으며, 이러한 협력은 대개 재산 보전과 생존을 위한 실리적 선택이었습니다.
타협을 모색한 올드 잉글리시(Old English)
앵글로노르만 정착민의 후손으로 아일랜드 문화에 깊이 동화된 '올드 잉글리시' 가톨릭 귀족들 중에는 종교적 관용과 정치적 자치를 조건으로 의회파와 타협을 시도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기대는 대부분 배신당했고, 크롬웰 정권은 이후 대규모 토지 몰수와 추방을 단행했습니다.
소수였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지지
그러나 이러한 지지와 협력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머물렀습니다. 드로그헤다와 웩스퍼드에서 벌어진 학살로 상징되듯, 크롬웰의 원정은 아일랜드인 대다수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침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아일랜드인이 종교와 이해관계, 생존 사이에서 크롬웰의 편에 섰거나 협력했다는 사실은, 당시 아일랜드가 단순한 '아일랜드 대 잉글랜드' 구도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한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