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알렉산더 해밀턴 스티븐스는 링컨 대통령의 무력 사용을 왜 비판했을까?

알렉산더 해밀턴 스티븐스(Alexander Hamilton Stephens, 1812~1883)는 미국 남북전쟁 시기 아메리카 남부연합(CSA)의 부통령을 지낸 정치가입니다.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그는 링컨 대통령의 무력 사용이 '필요하다'고 믿은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무력 사용 자체를 위헌적 폭력으로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한 인물입니다.

남부연합 부통령으로서의 스티븐스

스티븐스는 조지아주 출신의 법률가이자 정치가로, 남북 갈등이 극에 달한 1861년 남부연합의 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같은 해 3월 서배너에서 행한 이른바 '초석 연설(Cornerstone Speech)'에서 그는 노예제가 남부 새 국가의 초석이라고 공언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처럼 그는 남부 독립의 이념적 기둥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무력 사용에 대한 스티븐스의 입장

스티븐스는 주(州)가 연방에서 자유롭게 탈퇴할 수 있는 '주권 탈퇴권'이 헌법에 뿌리를 둔 권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이미 탈퇴한 주들을 군사력으로 억지로 연방에 되돌리는 것은 헌법이 부여하지 않은 권력 행사이자, 자치를 누리던 국민에 대한 침략에 불과했습니다.

1861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항의 섬터 요새(Fort Sumter)에서 전운이 감돌던 시기, 스티븐스는 남부가 먼저 총성을 울리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러나 링컨 행정부가 요새 보강을 위해 함대를 파견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고, 결국 포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섬터 요새 이후, 7만 5천 명 소집에 대한 반발

섬터 요새가 함락되자 링컨 대통령은 즉시 7만 5천 명의 의용병 소집을 선언했습니다. 스티븐스는 이 조치를 남부를 힘으로 굴복시키려는 '강압(coercion)' 정책으로 규정하며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그에게 링컨의 무력 사용은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라,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전면전으로 치닫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링컨과의 개인적 유대

흥미롭게도 스티븐스와 링컨은 1840년대 후반 연방 하원에서 함께 활동하며 개인적인 우정을 쌓은 사이였습니다. 두 사람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고 재커리 테일러의 대통령 선출을 지지하며 공동 보조를 맞추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스티븐스는 노예제와 주권 문제를 둘러싼 남북 갈등이 심화되자 남부의 독립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남부연합 부통령직을 수락했습니다.

1865년 2월에는 버지니아 햄프턴 로즈에서 열린 회담에서 링컨과 직접 마주해 종전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남부 독립 승인 여부를 놓고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해 결렬되었습니다.

전쟁 이후의 삶

종전 후 스티븐스는 연방군에 체포되어 보스턴항 포트워런에 잠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이후 조지아주 연방 하원의원으로 복귀했습니다. 1882년에는 조지아 주지사로 선출되었으나 취임 당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말년에 저술한 『남북전쟁의 헌법적 고찰(A Constitutional View of the Late War Between the States)』에서 그는 탈퇴의 정당성과 링컨 정부 무력 사용의 위헌성을 체계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정리

결론적으로 스티븐스는 링컨의 무력 사용을 '필요한 조치'가 아니라 '헌법을 짓밟는 폭력'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는 주권 탈퇴권을 근거로 남부의 독립을 옹호했으며, 링컨의 군사 대응이야말로 연방을 분열시키고 전쟁을 초래한 원인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다만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남부의 무단 탈퇴가 연방의 존속 자체를 위협했다는 점에서, 링컨의 대응을 연방 수호를 위한 정당한 조치로 보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